임범/영화 프로듀서
삶의창
요즘 ‘기자실’이라는 공간이 논란거리다. 신문사 떠난 지 반년이 넘었지만, 기자실은 내 20대 후반부터 10여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1989∼91년 법원을 출입할 땐 매일 서너시간씩 민사지법, 형사지법 등 법원 네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판결문을 읽어야 했다. 거기서 기삿거리를 찾고, 다른 기자 몰래 꼬불치기도 하는 일을 2년 가까이 하는 동안 법원 기자실 창밖을 보며 “이거 오래 하면 좋은 기자 되는 건가” 하는 회의에 빠지곤 했다. 96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비자금 사건으로 출두하던 날, 검찰청에 외신 기자까지 몰리고 취재용 헬기가 여러 대 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다는 설렘을 만끽했던 기억도 난다. 취재가 워낙 어려워 ‘화장실 출입 기자’라고 불리던 국세청 출입 기자 시절엔 정말로 화장실만 출입했다. 한국은행 기자실엔 조그만 침실이 있었는데, 한 명이 자고 나오면 일하는 아주머니가 곧바로 침대보를 새로 갈았다. 그곳은 위험했다. 한 번 누웠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버렸다.
기자실에 얽힌 추억은 많지만, 그곳이 그리우냐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기자였을 때도 그랬다. 기자실이 있든 없든 기자는 어차피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밥과 술을 산다고 해서 그들이 기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그들, 취재원과 정말 친해졌던 건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상대방이 자기 일과 대의명분에 충실하면서도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이라는 신뢰가 쌓인 뒤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런 취재원을 많이 만들지 못했지만, 그런 관계가 좋은 기사의 원천임에는 틀림없다.
몇몇 기자들이 기자실에만 죽치고 앉아 기사를 담합해 쓴다고 대통령이 말했고, 기자실은 치열한 경쟁의 공간이라고 반박하는 기사들이 나왔다. 얘기가 이렇게 흐르는 건 좀 답답하다. 기자실에만 죽친다? 게으른 이들은 어느 직종에나 있다. 담합? 할 때도 있을 거다. 내가 취재한 사실만으로 기사를 쓰기 부족할 때, 타사 기자 한두 명과 취재 내용을 공유해 기사를 썼다. 검찰이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쉬쉬하고 있을 때 그 사건을, 김대중 정부가 한-미 투자협정을 물밑에서 밀어붙이려고 할 때 그 잡음을 그렇게 보도했다.
결국 문제는 기사의 질일 터. 거기서 벗어나, 매일 특종 전쟁을 치르는 언론사를 두고 노동강도가 약하고(죽치고 앉아 있고), 경쟁을 회피한다(담합한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건 지엽말단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자실에서 열심히 경쟁한다며 기자실을 없애면 큰일나는 것처럼 말하는 언론의 대응도 이해가 잘 안 간다.
언론의 주장처럼 관공서 안에 있음으로 인해 기사의 단서를 잡게 되는 경우가 드물게 있겠지만, 뭐라 해도 그건 우연히 생기는 일이다. 유능한 기자라면 그 우연에 기대기보다 목표를 정하고 미리 준비하면서 움직일 것이다. 같은 취재원을 만나도, 질문이 세심하고 그로 인해 심도 깊은 기사를 쓰고, 그러면 그 이름에 신뢰가 쌓여 제보자가 생겨 특종도 하고, 이게 정석 아닐까. 이전에도 그 정석을 밟아 성과를 올리는 선배나 동료들이 존경을 받았고, 그들이라면 기자실이 있든 없든 차별성을 발휘할 것 같다.
기자실을 없애겠다는 정부에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기자실에 의존한 게 언론뿐이냐. 정부도 약점이 많아서, 또는 언론을 관리하기 편해서 편승해 온 것 아니냐. 그걸 없애겠다면 좋다. 언론도 정작 중요한 기사는 기자실에 의존해 쓰지 않았다. 정도대로 해보자’라고.
임범/영화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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