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정 / 르포작가
삶의창
며칠 전 길을 가다 한 아이를 만났다. 아이가 먼저 나를 알아봤다. 아이는 부쩍 자라, 첨엔 긴가민가했다. 아, 이제 아이가 아니다. 벌써 중학교 2학년이니. 5년 전 여름, 잠시 일한 공부방에서 만난 아이. 가끔 지나치며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았는데도 이번에 만났을 땐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웃으면 눈이 보이지 않는 그 얼굴은 그대로였다.
아이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는 아이와 함께한 애잔한 어느 하루가 있다. 그해 여름, 공부방 아이들과 바깥나들이를 다녀오면서 전철역의 높고 긴 자동계단을 타고 오를 때였다. 나는 아이보다 한 칸 위에 섰다. 한 공장에서 오래도록 일한 아버지는 공장 이전으로 멀리 경기도까지 교대근무를 나갔고, 어머니는 몸과 마음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다. 아이는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을 텐데도 풀죽거나 시든 얼굴이 아니라 밝게 웃었다. 그때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심란했던 나는, 전철 자동계단에 서서 웃는 얼굴로 재잘대는 아이를 보면서 적잖이 위로를 받았다. 늘 내 아픔이 가장 크리라 여기지만 실상은 더 많이 아픈 이들이 있고, 그래도 나처럼 우거지상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이를 보면서 깨달았다. 더불어 아픈 우리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 아이만은 아니었을 거다. 힘든 상황을 공부방에 나와서 이겨내던 아이가.
하지만 이제 그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다. 아이들이 살던 집들이 철거되고 깨끗하고 멋진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내가 아는 아이들은 단 한 명도 그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 아이는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갔지만, 다른 아이들은 멀리 이사 갔다. 서로 다 다른 동네로. 이사 간 첫해에는 아이들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해가 지나면서 발길이 끊겼다. 자기들이 살던 곳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이들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다행이다.
한 4년 새 아주 다른 곳이 되어 버린 동네. 조금 남은 주택가를 빼고는 다 전세금이 억대인 아파트로 바뀌고 가까이 있던 공업단지도 높고 빛나는 빌딩 단지가 되어 더는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분명 가난한 집들을 허물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집을 짓는 걸 다 봐 왔건만 갑자기 낯선 세상에 뚝 떨어진 것만 같다. 주택가에 사는 나는 아파트와 빌딩 숲에서 낡은 세상이 되어간다. 재개발 때문에 어디론가 비켜나야 했던 사람들처럼 나도 떠나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지난해에 다녀온 남미에서 산이나 모래벌판, 바닷가에 집을 지은 마을을 보았다. 닦이지 않은 길, 전기와 수도시설이 없는 마을도 있지만 어쨌든 가난한 사람들이 어울려 산다. 브라질 솔 나센치 산마을, 아르헨티나 바호 플로레스, 볼리비아 노동자 공동체, 칠레 레구아 마을, 페루 엘 살바도르 마을, 콜롬비아 볼리바르시, 브라질 바르카 마을이 그런 마을들이다. 짧게는 23년에서 길게는 70년이라는 역사를 가졌다. 바르카 마을은 벨렝 주정부와 함께 도시계획 사업으로 가까이에 이들이 살 집을 새로 짓는다. 가난한 사람들이 마을을 일구어 온 역사와 꿈이 고스란히 남은 여러 마을을 보면서 늘 어디론가 사라져야 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파트 주민이 아니면 아파트를 통과하지 말라는 펼침막이나, 철 담장 위아래로 가시돋친 철망을 쳐놓고 접근금지 팻말을 달아놓은 아파트를 보면 가슴이 막막하지만, 어머니도 건강하시고, 아버지도 여전히 일 다니시고 모두 잘 지낸다는 아이 말에 ‘가난한 사람 접근금지 사회’에서 그래도 우리들은 살아남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박수정/르포 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