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아침햇발
‘클린턴처럼 등장했다가 부시처럼 퇴장한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보수당의 18년 장기 집권을 끝내고 노동당 시대를 열었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마흔넷이었다. 1997년 취임 당시 그의 이미지에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겹쳐 있었다. 마흔여섯에 미국 대통령이 돼 재선에 성공한 클린턴은 탈냉전 지도자의 전형이 돼 퇴임 때까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블레어는 오는 27일 쓸쓸하게 물러날 예정이다. 2009년 초 임기가 끝나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하다.
블레어 10년 집권을 평가하는 두 가지 큰 흐름이 있다. 하나는 한 시대의 종말로 보는 것이다. 블레어는 진보정당인 노동당의 총리이면서도 마거릿 대처 전 보수당 총리의 이념을 계승한 것으로 비판받아 왔다. ‘대처의 진정한 후계자’ ‘비밀 보수당원’ ‘미국식 자본주의를 위한 트로이 목마’ 등이 모두 그를 가리킨다. 대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었다. 지난 20여년 계속된 ‘레이건-대처 보수혁명’의 마지막 주자가 블레어와 부시라는 것이다. 보수혁명의 퇴조를 알리는 결정적 사건은 무엇보다 이라크 전쟁 실패와 네오콘의 퇴장이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역풍 역시 거세다. 6년 전 취임하자마자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에서 탈퇴했던 부시도 최근 어쩔 수 없이 지구온난화 방지 노력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다른 시각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블레어는 분명히 새로운 좌파 정당을 만들어냈다. 좌파적 가치와 자유주의적 다원주의가 뒤섞인 중도적인 노동당이 그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처음으로 노동당의 세 차례 연속 집권을 이루고 영국의 정치 풍토를 바꿨다. 그에 이어 총리가 될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의 노선은 블레어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1년 반 전 나이 마흔에 보수당 총재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 또한 블레어처럼 중도 쪽으로 당 체질을 바꾸고 있다. 블레어는 진보정당을 개조한 것만큼이나 보수정당도 변화시킨 셈이다. 영국의 이런 추세는 다른 유럽 나라들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블레어가 국내 정책에서 얻어낸 성과도 적잖다. 최저임금 인상과 유급휴가 확대, 고용 창출과 실업 축소, 범죄율 감소와 경제 성장, 의료·교육 서비스 향상 등 모두 만만찮은 결과물이다.
불행하게도 대외정책 실패는 이런 국내정책 성과를 모두 가린다. 블레어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곧 인도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외 군사개입을 할 수 있다는 원칙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총리가 된 뒤 다섯 차례나 외국에 군대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의 한계를 보지 못하고 맹종한 탓에 이 원칙은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 최근 나온 보도들을 보면, 블레어는 이라크 침공 초기부터 현지 상황을 크게 우려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부시의 푸들’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부시 쪽에 선 데는, 전통적 동맹 관계 강화뿐만 아니라 대미 발언권을 높여 국제정치를 주도하겠다는 계산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구촌 주요 현안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갈수록 줄고 있다. 유럽이 오랫동안 힘을 발휘해 온 중동 문제에서도 영국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미국과 이스라엘 위주로 돌아간다. 블레어는 결국 한국의 이라크 파병처럼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다.
블레어는 21세기를 주도할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주목받았으나 특히 대외정책에서 20세기적 사고방식으로 행동함으로써 실패했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자신의 실패와 성공 모두를 통해 낡은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보수와 진보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