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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경원씨, 아니 경원아 / 박경철

등록 2007-06-29 17:33수정 2007-08-24 17:58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삶의창
병실에 입원한 경원씨의 딸이 면담을 청했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지만 어른스러운 아이다. 일찍부터 어머니가 안 계시는데도 참 반듯하게 자랐다. 병원에서 아이는 경원씨의 의젓한 보호자다. 경원씨는 오랫동안 술을 마셔 간경화와 식도 정맥류를 앓고 있다. 그래서 경원씨는 늘 폭탄 같은 존재였다. 식도 정맥류는 언제 터질지 몰라 불안하다. 지난해에도 그랬고, 지난달에도 한번 출혈이 있어서 결국 대학병원에서 ‘식도 정맥류 결찰술’이라는 어려운 시술을 받았다.

하지만 경원씨는 그때마다 의사 앞에서 한 단주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경원씨는 내가 금주를 얘기할 때마다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선생님, 우리처럼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은요~ 술을 안 먹으면 못 사니더, 하루종일 일하고 나면 오장육부가 녹고, 뼈마디가 다 주저앉는데, 술 한잔 안 먹으면 잠도 못 자니더…. 일 마치고 소주 한 잔 마시면 속이 짜르르 한 게 아픈 게 싹 사라지는데 우짜겠니껴, 참 죄송하니더 ….” 이런 말을 들으면 괜히 미안해진다. 나는 하루 저녁 책장 정리를 잠깐 하고도 하루종일 어깨가 결리는데, 온종일 노동일을 하시는 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술을 드시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경원씨와 나는 늘 가벼운 입씨름을 하곤 했다. “그렇다고 저 아이를 고아로 만드시겠어요?” 경원씨는 딸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고개를 숙였다. 그러던 어느날 경원씨가 검은 변을 보기 시작했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다시 출혈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였다. 경비와 시간을 고려해서 우선 우리 병원에서 입원을 시킨 다음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면 다시 종합병원으로 옮길 요량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 경원씨의 딸이 내게 면담을 요청했다. “선생님 우리 아빠 술 좀 안 드시게 단단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지난주에도 내내 술을 드셨어요.” 걱정이 가득 담긴 아이의 말에 “그래 나도 걱정이야.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저러시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내게 건넸다. “선생님이 아빠 친구시라면서요. 좀 확실하게 겁을 주세요.” 내가 경원씨의 친구라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니? 내가 아빠 친구라니?”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어, 모르셨어요? 선생님하고 저희 아빠하고 초등학교 때 한 반이셨다는데 ….” 그제야 경원이라는 이름과 어린 시절의 먼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겹치기 시작했다.

경원이와 나는 초등학교 3, 4학년께 한 반 친구였다. 우리 학교에는 인근 고아원에서 다니던 아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경원이가 그 중 하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에 내가 좋아하는 갈치포가 반찬으로 들어 있었다. 그것을 발라서 먹고는 빈 도시락을 펼쳐 둔 채로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경원이가 내가 입으로 발라 먹고 뼈만 겨우 남은 그것을 손에 들고 맛있게 먹고 있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경원이와 나의 인연은 각자 반이 갈라지면서 끝이 났다. 그런 경원이가 내게 환자로 찾아왔고, 경원이는 내가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 좋은 웃음에는 알듯 모를 듯한 친근감이 품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친구를 찾아와서 자기 몸을 맡기면서 친구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경원이의 헤아림보다, 그를 알아 보지 못한 내 무심함이 심장을 찔렀다. 만약 그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사람이었다면 일년 이상이나 환자로 만나면서도 과연 알아보지 못 했을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 길로 작은 주스 한 박스를 들고 그의 병실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내 얼굴과 양심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기 시작했다.

박경철/시골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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