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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공장에서 부르는 노래 / 박수정

등록 2007-08-03 17:34수정 2007-08-24 17:51

박수정 / 르포작가
박수정 / 르포작가
삶의창
여드레 전이다. 낡은 승합차를 탔다. 운전을 하는 차 주인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고, 다른 세 사람은 시를 쓰는 사람들이다. 그이들은 짧은 한때가 아니라 십수 년을 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다. 날아오는 공구에 머리를 맞아가며 일을 배우기도 했고, 안전장치도 없이 높이 이어진 형강 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 한순간에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기도 했다. 밥을 얻는 노동이지만 늘 즐거운 것만도 아니고, 내일은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만을 주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노동 한가운데서 그이들은 잠시 쉴 참에 담뱃갑에 시를 새기고, 못 쓰는 종이상자를 북 찢어 노래를 만들었다. 문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찾아간 것도, 작곡을 가르쳐 주는 스승을 만난 것도 아니다. 착하고 성실한 노동자로 살면 살수록 자신을 배반하는 세상이, 어디엔가 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 그이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했으리라.

서울서 세 시간 넘게 달려가 내린 곳은 구미 공단. 행정구역으로는 칠곡군에 있는 한국합섬 에이치케이(HK) 제2공장이다. 대구·밀양·마산·영천·부산에서 출발한 시인·소설가·가수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여전히 노동자이고, 농민인 사람들이다. 공장 마당에 작은 무대를 만들었다. 보랏빛 펼침막에는 ‘우리가 만드는 세상의 노래 2007 공장문학의 밤’이라고 써 있다. ‘문학의 밤’은 한 번씩 들어 봤을 테지만, ‘공장문학의 밤’은 낯설지 않은가. 1987년 7·8·9월에 일어났던 노동자 대투쟁 뒤 구로·인천·부천·대구·부산·광주·마산창원 지역에 ‘노동자문학회’가 하나둘 생겨나 90년대까지 ‘노동자문학의 밤’이라는 행사를 열기도 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그런 행사를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그런데 다시 ‘공장문학의 밤’이다.

하루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퇴근하면서 함께 어울려 하는 행사였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한국합섬 에이치케이 노동자들은 지금 일을 하지 못한다. 물건을 실어날랐을 커다란 트럭들이 공장 마당 한쪽에 하릴없이 서 있다. 굳게 잠긴 건물 현관 유리문에는 파산선고를 알리는 ‘통고서’가 붙었다. 부실경영과 임금체불, 정리해고, 희망퇴직, 공장가동 중단, 파산선고로 이어진 시간들을 견뎌내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닐 게다. 십여 년 넘게 손에 익은 일을 일 년이 지나도록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느낄, 속 타고 불안한 마음을 어찌 쉽게 안다고 하겠는가. 다행히 2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노동조합으로 모여 일터를 되살리고자 먼 서울 길을 오가며 갖은 애를 쓴다. 상경투쟁을 마치고 돌아와 고단한 몸이지만 아이들과 아내들과 함께 공장마당으로 들어선다.

공장문학의 밤을 한다니까 조합원들이 위원장한테 “도대체 공장문학의 밤이 뭔데?”라고 물었다고 한다. 무대에 선 위원장은 “그 정도로 문학은 어릴 때부터뿐 아니라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렵고 낯선 것이었다”고 말한다. 정작 문학이나 예술은 사람이 사는 이야기이련만 누군가를 소외시키며 그 이름을 지켜왔는지도 모른다.

일 년 만에 이어진 전기, 흐린 불빛 아래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른다. 한 시인은 가져온 시를 읽지 못했다. 시보다 더 아픈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을까. 농사를 밀쳐두고 서울에 올라가 아스팔트 위에서 싸워야 했던 수많은 날들이 떠올랐을까.

저만치 어둠속에 어린아이가 아빠 어깨에 얼굴을 얹고 살포시 잠들었다. 저 어깨가 무너지는 일은 부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저 어깨에 연대하려 시인들은 공장에서 노래한다.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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