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아침햇발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하며,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 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해나가야 하겠습니다.”
북쪽 사람들은 이런 말을 남쪽 사람에게 심심찮게 한다. ‘건국’은 ‘통일’로 바꿔서. 위 인용문은, 1945년 10월14일 젊은 김일성이 평양 시민 앞에 처음 나타나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한 연설의 일부분이다.
북쪽 사람들은 여전히 수십년 된 운동론적 관점으로 남북 관계를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인식이 객관적 조건을 따라잡지 못해 공허하다. 잘사는 남쪽이 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돈을 내놓는 건 당연하다고 강조하면, 남쪽 자본이 효과적으로 투자될 수 있도록 북쪽 체제를 바꿔나가야 할 당위성은 은폐되기 마련이다. 북쪽이 이른바 민족모순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북쪽은 미국과의 관계만 진전되면 모든 문제가 풀릴 듯이 행동한다. 미국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면서도 실제로는 미국에 기대는 꼴이다. 하지만 미국은 자신의 안보 이해와 패권 유지·강화에 치중할 뿐 북한 주민의 삶에는 큰 관심이 없다. 치열한 자구 노력 없이 북쪽이 미국으로부터 얻을 건 별로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 10여년 경제·사회 분야에서 여러 시도를 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본적 식량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고 탈북 행렬은 계속된다. 미국의 압살 정책에 맞서느라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이미 60대 중반을 지나고 있다. 앞날을 생각해 봐야 할 나이다.
이런 때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은 김 위원장에 소중한 기회다.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는 임기 중 핵 문제를 해결하고 대북 관계를 정상화하려 한다. 한국과 중국은 북한의 변화 노력을 뒷받침할 준비가 돼 있다. 일본의 적대적 대북 정책도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과거 중국의 덩샤오핑이나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한 것과 같은 김 위원장의 결단이다.
첫째, 핵 포기 뜻을 분명히해야 한다. 북쪽은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 전 주석의 유훈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해 왔다. 우선 과거와 현재의 핵 계획과 시설·물질·무기 등을 상세히 밝힘으로써 다른 나라가 의심을 가질 여지를 없애야 한다. 북쪽의 안보와 체제 보장에 대한 우려는 핵 포기 의지만 확실하면 어렵지 않게 풀린다. 6자 회담 자체를 뒤집을 수 있는 세력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
둘째, 개혁·개방 의지를 구체화해야 한다. 한민족의 역사적 당위인 한반도 경제공동체 구축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전제로 한다. 남북 상생 구조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협은 오래갈 수 없다. 북쪽은 지금 개혁·개방이라는 말을 꺼린다. 체제동요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먼저 개혁·개방의 길을 걸은 중국과 베트남의 집권세력은 정치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셋째, 한반도와 관련된 모든 사안의 중심에 한국이 있다는 사실을 흔쾌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도 그래야 실속 있게 진척된다. 북쪽이 강조하는 ‘우리 민족끼리’ 원칙은 남쪽을 핵심에 놓지 않는 한 비현실적 수사에 그친다. 북쪽을 일관되게 지원할 수 있는 나라는 남쪽뿐이다. 90년대 이후 한반도 관련국들이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은 남쪽보다 북쪽의 앞날에 훨씬 중요하다. 김 위원장은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이번 정상회담은 남쪽보다 북쪽의 앞날에 훨씬 중요하다. 김 위원장은 기회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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