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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남한산성’과 속국 콤플렉스 / 임범

등록 2007-08-17 20:50수정 2007-08-18 09:25

임범/영화 프로듀서
임범/영화 프로듀서
삶의창
영화의 흥행 코드와 비교해 볼 때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이 베스트셀러가 된 건 신기해 보인다. 알다시피 소설은 청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조선으로 쳐들어와 복속을 요구할 때, 인조가 그걸 거부하고 남한산성에 틀어박혔다가 싸움 한번 못 하고 한달 반 만에 성을 나와 항복했던 병자호란을 다룬다. 소설에선 암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그걸 뚫고 나가는 주인공도 없고, 극적인 반전이나 해피엔딩은커녕 영웅적 순교도 없다.

이 소설의 성공을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 나는 <남한산성>이 한국인들의 역사 깊은 속국 콤플렉스를 정면으로 헤집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최근의 아프간 인질 사태를 보자.

아프간 인질 사태는, 내용과 대상이 엇갈린 테러다. 그 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천국과 지옥>을 떠올리게 한다. 유괴범이 구두 공장 사장의 아들을 노렸는데, 납치해 온 건 사장 운전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도 유괴범은 구두 공장 사장에게 운전사의 아들을 죽이겠다며 막대한 돈을 요구한다. 탈레반은 한국인들을 납치해 놓고는 미국에게 자기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한다. 영화에선 사장이 돈을 주고 운전사 아들을 무사히 돌려받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미국이 탈레반 포로를 석방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독립된 법치국가인 한국의 정부가 미국에게 드러내놓고 석방을 부탁하기도 힘들다.

한국인들이 납치됐는데 막상 한국 정부는 열쇠를 갖고 있지 않은 사태를 맞아, 이 비극의 책임을 여기저기에 물으려는 말들이 쏟아졌다. 한국 기독교의 선교 열풍을, 미국을, 한국 정부를, 탈레반을 향해 저마다의 비판이 나왔지만 막상 생명이 위급한 사태가 벌어진 시점에서 어느 하나 제대로 과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이런 분노가 반미로 연결되면 안 된다는 우려도 나왔다. 급기야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말은 겉돌 수밖에 없는 상황.

소설 속의 남한산성도 비슷했다. 먹을 게 떨어져 가고, 사람이 죽어 가고, 말들이 난무한다. 그 와중에 인조는 명나라에게 망궐례를 올리며 베이징을 향해 절한다. 이걸 반대편 산 위에서 바라보던 청의 칸이 읊조린다. “난해한 나라로구나….” <남한산성>은 과거의 극단적인 상황을 빌려 오기는 했지만, 우리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강변한다. 물론 당시의 왕조 시대와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를 단순 비교하는 건 위험한 일이며, 인질들을 구해야 하는 당장의 시급한 과제 앞에서 예의도 아닐 것 같다.

온전하게 소설로 돌아와 보면 <남한산성>은 자조와 허무 속에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서 개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우리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자기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이시백, 서날쇠 같은 이들에 대한 소설의 묘사엔 존경심이 있다. 청과 싸울 것을 주장하는 김상헌과, 청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최명길도 마찬가지다. 둘은 각각 죽음과 삶 속에 길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 아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진다. 이들의 대척점에는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 성 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아무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김류나, 보초도 서지 못하면서 상황을 무시한 채 싸우자고만 외쳐대는 사대부들이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것밖에 안 되는 상황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그럼 오래도록 이어져 왔고 지금도 틈틈이 현실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속국 콤플렉스를, 소설은 어떻게 하라는 걸까. 소설은 답하지 않는다. 거꾸로 그 답이 결코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건 쉽지 않은 성취다.

임범/영화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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