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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밴드의 꿈 / 임범

등록 2007-09-07 17:54

임범/영화 프로듀서
임범/영화 프로듀서
삶의창
추석에 40∼50대 남자들이 록밴드를 만드는 영화 두 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즐거운 인생>이 개봉한다. 이 중 한 편만 봤지만, 둘 다 일과 직장에 지치고 상처받은 중년 남자들이 음악을 통해 삶의 열정을 회복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무한경쟁과 성과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 거기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위로, 가족이나 단체의 일원으로가 아니라 독립된 개인으로 확인해야 할 자기 존재감의 소중함에 대한 각성 등을 담으려 했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얘기들이고, 한국 영화가 의도는 해 왔지만 본격적으로 시도한 경우가 많지 않은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런 위로와 각성을 다루려고 할 때 등장하는 게, 두 편 모두 ‘밴드’일까. 꿈과 열정이 많지만, 그만큼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은 청소년들에게 록음악이 갖는 소구력이 클 터. 삶이 보잘 것 없게 느껴지는 중년을, 다시 초심 같은 삶의 열정과 대면시키려 할 때 록음악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좀 더 부연하고 싶은 게, 두 영화의 감독이 나와 같은 세대인 40대 중후반이라는 점이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중고교 시절 나나 내 친구, 내 형이나 형 친구 중의 적지 않은 이들이 ‘할리우드 키드’이기보다 ‘로큰롤 키드’였다. 70년대 영·미 팝이 워낙 주옥같기도 했고, 검열에 시달린 영화와 달리 이들 팝은 미군방송을 통해 여과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또 미군부대로 들어오는 최신 앨범들이 무단 복제돼, 싼 값의 엘피판으로 ‘광화문음악사’ 같은 음반가게에 진열됐다.

<월간 팝송>을 읽고 또 읽고, 뜻도 모른 채 영어 가사를 외우고, 수업시간에 몰래 이어폰 꼽고 미군방송 라디오를 듣고, 앨범 표지에 어쩌다 실린 ‘야한’ 사진에 감격하고 …. 자꾸 들으면 연주하고 싶게 마련. 고1 때 키보드를 해 보자는 생각에 시내의 한 재즈 음악학원을 찾아갔다. 거기서 나눠주는 악보는 기본 코드, 평이한 박자의 트로트 곡들이었다. 내가 알고 싶었던 복잡한 코드나 미묘한 박자들을 배우려면 한참 걸리겠다 싶어 등록하지 않았다.

신문 기자를 하던 30대 중반에 몇몇 친구들과 밴드를 하자는 말을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했던 게 발단이 돼, 서초동 검찰청을 출입하던 와중에 영동네거리에 있던 서울재즈아카데미의 재즈피아노반에 등록했다. 거긴 달랐다. 재즈의 코드·음계·박자를 원리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스윙, 블루스 같은 단어의 뜻을 온전히 알았을 때 쾌감과 함께 “왜 이런 걸 초·중·고교에서 안 가르쳐줬을까” 하는 일종의 서러움까지 일었다. 하지만 출입처가 바뀌면서 6개월 코스를 한 달 반 만에 그만뒀다. 등록하던 날 학원 라운지에서 레드 제플린의 <블랙 독>의 기타 추임새를 혼자 골똘히 연습하던, 많이 마른 생머리 여자의 모습이 빛바랜 사진으로 머리 안에 남았다.

1년 뒤 대학로로 옮겨 간 재즈아카데미에 복학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은 내 의지 부족이었다. 그러니 내 ‘밴드의 꿈’이나 이 글 모두 허접한 것이지만, 앞에 말한 ‘서러움’은 맘에 남는다. 그땐 학교에서 상대음에 기초한 재즈를 배제하고 절대음에 기초한 클래식만 가르쳤다. 두 영화 속 중년 남자들의 꿈에 절실함을 보태는 게, 록을 좋아하면서도 거기 다가가기 힘들었던 ‘로큰롤 키드’ 세대의 서러움이기도 할 터. 다행히도 수년 전부터 음악교과서에 대중음악의 비중이 커졌다고 한다. 하지만 입시 경쟁도 더 치열해졌으니, ‘밴드의 꿈’은 다음 세대에게도 계속 ‘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임범/영화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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