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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씨앗, 생명이며 희망이며 / 박수정

등록 2007-09-14 17:58

박수정/르포작가
박수정/르포작가
삶의창
어릴 때 옆집에서 고사지냈다며 가져다 준 시루팥떡에 맛을 들인 뒤였을까. 팥으로 만든 거면 뭐든 좋아한다. 시어머님께서 챙겨준 팥을 냉동실에 넣어놨다가 가끔 죽을 쑤려고 씻어서 물에 담가놓으면 그리 예쁠 수가 없다.

여태껏 붉은팥 한 가지만 알았다. 앵두팥·굵은앵두팥·시그나리팥·껄팥·돌팥·산달팥·쉬나리팥·색깔쟁이팥·개골팥·앙가래팥·길팥·흰팥·재롱팥·유월팥·시월팥·이팥·물팥·끝팔·두루팥·붉은신나리팥·잔슈날이팥·새대가리팥·붉은왕팥·시나리팥·그루팥·검정팥 …. 생김새나 빛깔에 맞게 이름 붙은 이런 팥들이 있는 줄 몰랐다. 이걸 안 건 열흘 전 서울에서 열린 ‘국제종자포럼’에서다. 행사장 뒤쪽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팥을 보면서 놀랐다. 그 다양함과 40년 가까이 살면서 오로지 한 가지 팥밖에 모르는 내 빈약함에 말이다. 깨·호박·콩도 여러 가지다. 곡식과 채소로 따지자면 그 가짓수는 얼마나 엄청날까. 하지만 우리 곁에서 벌써 사라지고 없는 작물들도 많을 거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과 국제소농연대조직인 비아 캄페시나가 마련한 행사에는 우리나라 여성농민과 칠레, 인도네시아, 티모르-레스테, 캄보디아, 타이, 필리핀 여성농민들이 함께했다. 몇 사람은 고유한 자신들 옷을 입었고, 대부분은 고유한 자기 언어로 이야기를 했다. 여러 단계로 통역하느라 시간은 길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못 알아들어도 내가 쓰는 말과 다른 말을 듣는 일은 신비로웠다. 저 팥들처럼 말도 다 다른 억양과 빛깔을 자아냈다. 땅을 일구고 씨 뿌리고 생명을 보살피고 열매를 거두는 그이들 목소리는 참 부드럽고 낮고 작고 겸손했다. 거칠거나 높거나 크거나 거만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으니,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세계를 뒤덮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농업은 농사짓는 사람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사람이 기본으로 먹고 살 것을 다양하게 키워내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이윤을 위해 정부와 대기업은 수출할 단일작물 생산을 유도해 오히려 식량이 모자랐다. 생산량이 늘어날 거라며 정부는 다국적 기업이 파는 씨앗을 사라고 강제해 토종작물이 남아나지 못하고, 씨앗을 갈무리하는 일도 사라졌다. 농민은 돈을 주고 씨앗과 모종을 사야 한다. 다국적 기업이 파는 유전자가 변형된 씨앗은 그에 맞는 거름이며 비료, 농약, 농기계를 사게 만든다. 땅은 산성으로 바뀌고 사막으로 변했다. 늘어가는 건 빚이고, 다시 빚을 내 농사짓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돈 없이는 농사지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농민들은 땅을 등지고 도시의 가난한 자리를 찾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한자리에 모인 여성농민들은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생물 다양성과 문화 다양성을 파괴한다. 씨앗을 개량하고 공급하는 문제가 기업에 좌우되는 현실은 바람직하지 않다. 농민이 생산해 얻는 수확물이면서 다음해 농사를 위해 필요한 생산수단이기도 한 씨앗은 식량주권을 실현하는 시작이다. 씨앗이 없는 것은 정체성을 잃는 것과 같다. 지속 가능하고 지역적인 식량체계를 지향해야 한다. 더는 초국적 기업에 지배받는 정부에 우리 삶을 맡길 수 없다. 씨앗과 자연자원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세계가 연대해 영세농민들의 정치적 힘을 키워야 한다”고.

농민들이 겪는 문제는 우리 삶에 닥친 문제다. 다국적 기업은 건강하지 않은 먹을거리로 세계 사람들의 입맛을 똑같게 만들고 식량주권마저 내놓으라고 강요한다. 이에 맞서지 못하면 저 팥들과 다른 곡식들을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서로 다 다른 말도 사상도 문화도 사람도 존중받지 못하고 잃을 것이란 생각은 너무 지나친 걱정일까. “씨앗은 생명이며,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라고 한 말이 가슴에 남는다.

박수정/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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