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논설위원
아침햇발
당사자들은 피가 마를지 몰라도 정치판의 경선만큼 흥미 있는 구경거리도 많지 않다. 사전 각본이 없어 예상과 다른 결과가 자주 나온다. 그 때마다 재미가 늘어난다. 특히 매주 한번씩 성적표 공개로 순위가 엎치락뒤치락 할 때의 스릴은 민주정치가 유권자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런 면에서 한나라당의 후보 경선은 미흡했다. 권역별로 순차적으로 투·개표를 하지 않고 마지막에 몰아서 총점을 매기는 식이어서 긴장도가 떨어졌다.
지난 주말 뚜껑을 연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 경선은 흥행면에서는 출발이 괜찮다. 초반부터 역동적이다. 5년 전 민주당 경선 때처럼 인기 절정의 ‘주말 드라마’ 수준까지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초반 결과는 확실히 유권자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동의없는 선거인단 등록 등 코미디적인 요소와 낮은 투표율 등 극복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렇고 그런 ‘당신들만의 잔치’에서는 벗어날 가능성을 일단 보여줬다.
일등 공로자는 손학규 후보다. 역설적이게도 ‘손학규 대세론’이 붕괴된 덕택이다. 손 후보 쪽은 믿었던 대세론이 하루 아침에 사라진 데 대해 당황하는 기색이다. 한나라당 탈당 이전인 올 초부터 지금까지 줄곧 범여권 후보 지지율에서 부동의 1위를 달려왔으니 큰 표차의 2위가 왜 허탈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울산에서는 4위였다.
손학규 대세론이 깨진 것은 정동영 후보의 강한 조직 때문만이 아니다. 결속력이 강한 친노 주자들이 이해찬 후보로 단일화한 탓도 아니다. 물론 투표율이 20% 안팎에 불과해 조직이 강한 정 후보에게 유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친노 주자 단일화 효과도 일정 부분 있었다. 그러나 손 후보의 지역 조직도 결코 만만치 않다. 내가 보기에 대세론 붕괴의 원인은 전적으로 손 후보 자신에게 있다. 그는 야당에서 여권으로 자리를 바꾼 뒤에 여권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전혀 설득시키지 못했다. 아니,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별로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망한 집을 다시 살리려면 세상이 알아주는 나를 앞세워야 할 것 아니냐’는 식이었다. ‘돌아온 탕아’가 아니라 스스로를 여권의 구세주로 자리매김했다. 민심을 내세워 당심을 앉은 채로 접수하려 했다. 한나라당 전력에 대한 최소한의 의견 표명이나 반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에는 “한나라당에 있었던 것이 민주신당의 짐이 되기보다 자산과 효자가 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일종의 말 실수로 보이지만, “80년 광주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본래 자존심은 어려운 처지일수록 더 강해지는 법이다. 더구나 여권 핵심 지지자들은 정치의식이 매우 높다. 곤궁하다고 해서 아무데나 손을 내밀지 않는다. 대신 뜻이 통하고 마음이 맞으면 저금통을 털어 스스로 뛰는 사람들이다. ‘이기기 위해서는 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뻣뻣한 자세로는 절대 통할 수 없다.
뒤늦게 깨달은 것일까. 손 후보는 제주 울산에서 진 뒤 광주로 가서 “광주를 훼손하는 정치세력과 함께 했던 사실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드린 것에 대해 마음깊이 사죄드리고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탈당 이후 처음으로 한 과거 반성이다. 경선에 이기고 지고를 떠나 정치적 위치를 옮긴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하고, 새 지지자들과 융합하기 위해서는 진작에 했어야 할 자기 성찰이다. 진정으로 여권 지지자들에게 녹아들어가서 한지붕에 있다는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하면 정치인 손학규의 미래는 없다.
경선 구경 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변이나 순위만이 아니다. 레이스 도중 위기에 빠진 주자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주요한 관전 포인트다. 손 후보는 그 첫 관찰 대상이다.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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