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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제2의 인생이 기회가 되려면 / 이창곤

등록 2007-10-25 18:11수정 2007-10-25 19:17

이창곤 논설위원
이창곤 논설위원
아침햇발
일선 사회부 기자 시절에 만난 전직 경찰공무원 ㄱ씨와 오랫동안 친분을 나누고 있다. 늘 책을 놓지 않아 ‘학경(學警)’이라고 불렸던 분인데, 지금은 한 기업체에서 고위직으로 재직 중이다. 얼마 전 이 분을 만나니 은퇴 뒤의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고 했다. 엉뚱하게도 수의사를 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게 아닌가. ‘아니, 그 연세에 오버하는 게 아니에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나이 드신 분의 호기를 꺾을 순 없다. “대단하네요. 하지만 대학에 다시 들어가거나 편입해야 할 텐데”라고 하니 “그래야지요”하며, 이미 부인과 상의도 끝냈다고 한다. 그냥 해 본 소리가 아닌 것이다. ‘왜 굳이 수의사인가?’란 물음에 그분은 “어릴 적부터 동물을 좋아했는데 제2의 인생을 불쌍한 동물들을 돌보며 지내고 싶다”고 답했다.

바야흐로 ‘인생 이모작, 아니 다모작 시대’라고들 말한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듯 요즘 언론은 노후의 인생설계에 성공한 사람들을 다투어 알리느라 법석이다. ‘노(老)테크’란 말도 회자된다. 우리 사회가 빠르게 고령사회(65살 이상 노인인구의 비율이 전체의 14% 이상)로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하긴 고령이 더는 ‘무기력한 은퇴’이기만 해서야 되겠나. ㄱ씨처럼 그것은 이제 삶의 새로운 기회이자 도전이기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은퇴를 새로운 인생의 기회’로 일굴 가능성이 있는 중장년층이 몇이나 될까? 당장 하루하루의 삶조차도 버거운데, 5년 또는 10년 뒤의 설계는 그저 헛된 공상일 뿐이라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중장년층은 흔히 가정과 사회에서 큰 짐을 지니고 있는 한편, 각종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이른바 ‘제2의 사춘기 세대’다. 노부모 부양, 중장년기를 함께 맞는 배우자와의 갈등, 독립적 자아를 형성하는 자녀들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 등이 어깨를 짓누른다. 여기에 중견 직장인으로서 압박과 명예로울 수 없는 ‘명예퇴직’의 공포마저 옥죈다.

이러니, 경력 설계와 노후 준비는 그저 먼 나라 얘기이기 십상이다. 실제 안명옥 의원이 그제 내놓은 자료를 보니, 우리 나라 사람 10명 중 1명만이 노후대책이 충분하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노동연구원에 의하면, 우리 나라 노동시장 은퇴자에 대한 만족도 조사결과, ‘은퇴 후 좋다’는 응답자는 8.1%에 불과했다. 반면 나쁘다고 답한 이는 55.5%에 이르렀다. 미국의 은퇴자는 비슷한 물음에 ‘좋다’가 46.5%인 반면 ‘나쁘다’는 18.5%에 그쳤다.

한국과 미국 은퇴자들의 이런 차이는 노후준비와 은퇴 후의 진로 등 경력설계를 위한 국가·사회적 지원체계가 있느냐의 여부와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각 주에서는, 중장년층의 경력설계를 지원해주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실상 선진국에서는 대체로 경력설계도 궁극적으로는 국가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과제로 본다. 일본에선 ‘고령·장해자 고용지원기구’란 독립법인이 국가의 위탁을 받아 중장년층 직장인의 경력설계를 해준다.

우리 나라도 고용정보원과 대기업 등에 관련 서비스가 없진 않다. 하지만 수혜 대상자도 극소수인데다 재취업 및 창업지원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완전 무장해제 상태다. 스스로 여력도 없는데다 사실상 어떤 지원서비스도 없다. 우리 사회도 이젠 각 개인이 생애에 걸쳐 자신의 경력과 건강, 가족과 조화 등을 설계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생애통합적 관점의 고령화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은퇴 이후 수십년을 불안과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개인은 물론 정부와 지자체, 기업이 함께 이 고민에 동참할 일이다.

이창곤/논설위원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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