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논설위원
아침햇발
대구의 한 고등학교는 교훈이 ‘잘 살자’다. 기발하고 재밌다. ‘잘 살자.’ 난 이 말이 참 좋다. 이 세 음절에 불가해한 삶의 궁극이 함축돼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잘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돈을 많이 번다, 권세나 명예를 얻는다,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사랑과 봉사 또는 영성의 삶? 아니면 이 모든 것인가? 저마다, 시대마다 조금씩은 다를 것이다.
강조하고 싶은 바는 잘 사는 것이 온전히 나 자신, 곧 개인의 것일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이웃, 사회, 국가, 세계의 자장을 벗어나 온전히 홀로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개인은 없기 때문이다. 너와 나 모두가 잘 살아야 우리가 진정 잘 살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제는 그래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사람과 사람’ 속에서 나누어 가는 삶은 누구나 끄덕일 수 있는 ‘잘 사는 삶’이 아닐까?
다 함께 잘 살려면 보편적 가치를 가꾸고 지키는 게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선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정의와 사회적 형평이 아닐까 싶다. 정의는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다. 진보든 보수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정의론>을 쓴 존 롤스는 이를 공정성이라고 본다. 운동경기의 ‘페어플레이’를 생각하면 쉽다. 사회적 형평은 사회·경제·정치적으로 불리한 처지의 계층을 위해 나라가 공평성과 평등성을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이 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와 수준이 사회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너무나 얕다는 데 있다. 현실에서는 이들 가치가 숫제 뒤집힌 경우를 볼 때가 많다. 불공정과 불평등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대선 정국만 봐도 그렇다. 대선은 장차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와 직결되는 대통령을 뽑는 자리다.
이명박 후보는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주가조작 등 갖은 의혹에 거짓말과 말바꾸기를 일삼아도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신의를 저버리고도 당당히 대선에 나와 순식간에 2위로 급부상했다. 정동영 후보는 정치공학적 주판에 더 열중이다. 검증도, 정책도 없는 이상한 대선이다. 삼성 비자금의 경우는 어떤가. 수사 대상인 삼성보다 의혹을 제기한 내부고발자를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여론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할 말을 잃는다.
정의와 형평의 눈으로 볼 때 용납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대응방식과 태도는 더 큰 문제다. 정면으로 응시하기보다 회피하거나, 엉뚱하게 잇속에서 답을 찾는다. 문제의 후보들을 비판하면서도 자신과 자식의 역할모델로 그들을 선망한다. 정치권의 무책임과 무능을 비판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정치판에 기웃댄다. 감투와 돈에 대한 집착은 거의 편집광적이다. 성장만이 제일이란 시대착오적 담론은 또 무언가? 경쟁력 강화 외에 대안이 없다며 불평등과 불안을 더 부추기고 있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공정성 의식’이란 논문에서 석현호·차종천 교수(성균관대 사회학)는 공정성과 불평등을 잣대로 해 사회를 넷으로 나눈다. 불평등하며 불공정한 사회, 불평등하나 공정한 사회, 평등하나 불공정한 사회 그리고 평등하며 공정한 사회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공정과 불평등이 일상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구성원의 대다수가 ‘잘 살길’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듯 우리 사회의 핵심적 문제는, 그 뿌리를 찾다 보면, 불공정과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원인일 때가 많다. 민주화 20년 이후, 민주화 적통을 이었다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에도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불공정과 불평등인 것이다.
이창곤/논설위원 goni@hani.co.kr
이창곤/논설위원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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