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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유권자 수준의 대통령 / 김지석

등록 2007-11-29 18:12

김지석/논설위원
김지석/논설위원
아침햇발
지난주말 치른 총선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집권당이 우파에서 좌파로 바뀌었다. 11년 동안 재임한 자유당의 존 하워드 총리는 지역구에서도 떨어졌다.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긴 경제성장세를 이끈 지도자 치고는 치욕스런 퇴장이다.

선거전에서 부각된 쟁점은 노동정책이다. 자유당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치며 노동 유연성을 높이려 하자 노동당은 ‘노동자 보호’로 맞섰다. 유권자들이 노동당의 손을 들어준 데는 성장의 과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인식이 작용했다. 특히 인구의 3분의 1에 이르는 세입자들은 7%에 가까운 고금리와 인플레에 시달려 왔다. 유권자들은 ‘무자비한 성장 추구’가 아닌 ‘지속 가능한 성장과 복지의 결합’을 택했다.

이런 결과는 경제를 화두로 진행되는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전 양상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 나온 유권자는 한 대통령 후보의 투기 의혹에 대한 생각을 묻자 명쾌하게 말했다. “그 정도 능력이면 외국에서 투기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오지 않겠어요?” 오스트레일리아 식으로 말하자면 어쨌거나 자유당이 낫다는 얘기다.

하지만 자본의 권력이 비대한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선 국민 복지와 기업 성장이 함께 이뤄지기 어렵다. 모든 소비자는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사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려면 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져 일자리가 줄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국민은 소비자이자 생산자이므로 양쪽 이점을 다 누릴 수는 없다.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유권자들이 이번에 깨달은 게 바로 이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상당수 유권자들은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총선에서 대외정책은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가장 큰 변화를 느낄 분야가 대외정책이다. 미국만 바라보던 대외정책 기조는 중국·인도 등 아시아 중시 정책과 균형을 잡게 될 듯하다. 총리가 될 케빈 러드 노동당 당수는 우선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에 서명하고 이라크 주둔 병력의 절반 이상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대외정책이 선거 이후 급격히 달라지는 경우는 흔하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대표적 사례다. 당시 쟁점은 국내 사회·경제 정책이었고,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가 이기더라도 대외정책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그는 취임하자 마자 이전 빌 클린턴 정권의 정책 기조를 완전히 뒤집었다.

우리나라 대선전도 다를 바 없다. 대북정책을 포함한 대외정책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큰 쟁점이 되지 않고 있다. 6자 회담과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보수 후보들이 발톱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승리하면 과거 부시 대통령이 네오콘을 정부 요직에 대거 등용해 ‘클린턴 뒤집기’(ABC·Anything But Clinton)를 본격화했듯이 ‘이전 정권 정책 뒤집기’를 시도할 가능성이 적잖다. 부시를 찍은 유권자들이 지금의 이라크 사태를 상상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나라 대외정책에서도 의외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정곡을 찌르는 경구로 유명한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값어치만큼 지배됨을 보증하는 체제”라고 했다. 유권자 수준이 바로 민주주의 수준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대의 민주주의는 많은 결함을 안고 있다. 유권자들은 대개 최선도 아니고 차선도 아닌 차악의 후보를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렇더라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후보들의 말뿐만 아니라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대통령은 유권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법이다.


김지석/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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