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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 / 김종철

등록 2008-03-20 19:42

김종철 논설위원
김종철 논설위원
아침햇발
“문화예술에 보수와 진보가 어디 있습니까? 항상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 문화예술은 근본적으로 진보 아닙니까? 그것은 편가르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정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한테 정말 필요한 게 뭔가, 목표가 뭐냐는 겁니다.”

이른바 ‘좌파 문화권력’을 적출하겠다면서 혈안이 돼 있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비판하는 말이 아니다.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유 장관 본인이 한 얘기다. 그가 문화 수장으로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악하고 표독스런 말을 요새 하도 많이 해서 대체 어떤 사람인가 싶어 자료를 뒤지다가 우연히 찾았다. 서울문화재단 대표를 그만둔 직후 일반인 신분으로 했던 인터뷰(문화일보 2006년 9월30일치) 내용 중 일부다.

불과 1년 반 만에 문화예술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180도 바뀐 까닭을 스스로 얘기하지 않으니 알 수는 없지만, 돌아가는 판세를 보면 대충 짐작은 된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노무현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들을 공공기관이나 문화계 등에서 쫓아내겠다고 포문을 연 데 대해 청와대가 “맞는 얘기”라고 두둔한 뒤에 유 장관이 나섰으니 결국 청와대에 코드를 맞춘 행보로 보인다. 주특기가 연기이니 연출자가 원하는 대로 나팔수 배역을 오죽 잘 소화하겠는가. 어쨌거나 한때 평판이 좋았던 배우가 예술혼이 없는 3류 광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 같아 씁쓸하다.

새 코드에 맞춰 천박한 칼춤을 함부로 추는 이도 문제지만, 아무래도 주된 책임은 국정 운영의 총 연출자인 청와대, 곧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 당선 이후 지금까지 이 대통령은 그동안 확립된 법과 민주적 전통, 질서를 존중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짓밟는 ‘거꾸로 정치’를 해 왔다. 공공기관과 문화예술계 인사 퇴출 문제만 해도 그렇다. 낙하산 인사나 코드 인사를 방지하기 위해 여야가 공모제와 임기제를 도입한 법을 정권 교체라는 상황 변화 하나를 이유로 깔아뭉개고 있다. 지금처럼 다 쫓아내려면 공공기관이나 정부 산하단체장의 임기는 정권 교체 때는 전임 대통령과 함께한다라는 식으로 법을 먼저 바꿔야 한다.

이전 정권에서 공모제가 유명무실했으며, 과거에도 퇴진을 압박한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변명으로 삼는 것은 더 나쁘다. 그렇다면 이 정부는 과거의 잘못된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과거와 같이 낙하산과 코드 인사를 하겠다는 뜻 아닌가. 하기야 이미 오래 전부터 어떤 자리에는 누가 내정됐다는 등의 소문이 정치권에 나돌았다.

공직 인사와 당내 공천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투기에 병역 면제 논란, 논문 표절, 떡값 수수 의혹 등 허물투성이인 사람들을 고위직에 임명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그동안 오랜 세월에 걸쳐 높여 놓았던 공직자의 도덕성을 하루아침에 다 허물어뜨렸다. 민주주의와 사회 발전에 커다란 후퇴다. 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공천으로 여당을 사실상 대통령 당으로 만들었다. 오락가락 기준으로 상대편에 선 사람들을 주로 자르고 그 자리에 자기 사람을 대거 심었다. 당내에서조차 공존보다는 승자 독식의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게다가 다른 중진 의원은 다 쫓아내면서 대통령 형님만 일찌감치 공천을 줬다. 권력이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염치나 자제력도 없다. ‘친박 연대’라는 웃지 못할 정당이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다.

정권 교체는 혁명이 아니다. 모든 것을 맘대로 해도 좋다는 무한 권한을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게 결코 아니다. 권력 행사에 우쭐해서 국민을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정치권력은 늘 실패했다.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정부의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50% 안팎으로 떨어진 이유도 딴 데 있지 않다.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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