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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창] 20여년 전 학생들은 / 박수정

등록 2008-05-02 19:22수정 2008-05-14 21:53

박수정/르포작가
박수정/르포작가
삶의창
어느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학교에서는 학기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달마다 월말고사, 월요일마다 주초고사, 토요일마다 주초고사에 대비한 주말고사를 보았다. 시험 보는 날 아침이면 학생들은 “시험공부 하나도 않고 잠만 잤어” 하면서 공부한 흔적을 감추거나, “너 공부 많이 했지? 날 샜지?” 하면서 친구를 떠보아야 했다. 시험은 학생들을 서로 경쟁 상대이자 적으로 만들었다. 그 어느 누구의 말도 진실이 아닌 거짓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관계 맺기’나 ‘소통’은 힘든 일이었다.

공부하라며 내 준 숙제도 만만찮다. 과목마다 내는 숙제 말고도, 담임선생이 영어나 수학 숙제를 내주었다. 날마다 연습장 석 장씩 메우기가 주말이면 열 장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머리를 썼다. 샤프펜슬에서 연필로, 미술연필로 연필심이 점점 굵어졌다. 글자와 글자, 숫자와 숫자 사이 여백이 갈수록 넓어졌다. 그러자 교사는 연습장을 반으로 접어 빽빽하게 쓰라고 했다. 교사가 강압적일수록 학생들은 요령을 피웠다. 연습장을 다 채우지 못 한 날이면 학생들은 앞에 했던 숙제를 뒤로 옮겼다. 연습장의 스프링을 살살 돌려 빼내면 가능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오래가지 못했다. 뭉개진 연필자국 때문에 이내 들통이 났다. 교사도 방법을 마련했다. 숙제 검사를 하면서 마지막 장에만 하던 사인을 이제 모든 장에 크게 쫙쫙. 반평균은 곧 담임선생의 성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담임선생은 채찍을 든 마부가 되어 아이들을 마구 달리게 했다. 감성이 섬세한 선생님은 괴롭지만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써야 했다. 교사와 학생은 서로를 알 필요도 없었고, 알기도 전에 미워했다.

출근하는 어른들보다 먼저 집을 나섰던 학생들은 퇴근하는 어른들보다 더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자율학습은 원하지 않아도 해야 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엎드려 자면서도 자리를 지켜야 했다. 저녁을 먹는 시간이면 어떤 아이들은 보온 도시락밥을, 어떤 아이들은 차가워지고 딱딱해진 도시락밥을 먹었다. 그리고 자식한테 온전히, 혹은 지나치게 자기를 내다 바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어머니를 둔 어떤 아이들은 막 지은 밥을 먹었다. 비가 쏟아져도 바람이 불어도, 그런 어머니들은 새로 한 밥과 반찬을 싼 보온 도시락을 들고 교실로 찾아왔다. 밤 10시, 자율학습이 끝나면 교문 앞에는 차들이 아이들을 기다렸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승용차를 타고 사라지고, 다른 한 무리의 아이들이 독서실 승합차를 타고 사라졌다. 짐짝처럼 자신을 실어갈 밤늦은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학교 앞 정거장에 남았다. 따뜻한 도시락과 승용차, 독서실 승합차 앞에서 아이들은 서서히 자신의 경제기반과 계급을 알아나갔다.

학교는 방학 보충수업을 앞두고 반마다 5등 안에 든 학생들을 따로 모아 우수반을 만들었다. 이제 게임은 끝났다. 학교는 이제 모든 학생들과 함께 가지 않는다. 선택된 학생들만 이끌고 입시전쟁에 나서는 것이다.

어느 날, 번호대로 한 명씩 교무실로 갔다. 성적표를 놓고 담임선생이 상담을 했다. 눈이 크고 말을 재미나게 하던 한 아이가 눈물바람을 하며 교실로 돌아왔다. 분노하며 소리쳤다. “우리 같은 애들은 포기했대. 우리는 학교에 등록금 내 주러 다니는 것일 뿐이야!” 그러고는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20여 년 전 그 친구 모습이 아직도 내 가슴에 생생하다. 차마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학교와 교육의 비밀, 혹은 비열함을 입 밖으로 토해내던 그 친구가 요즘 자주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행복했는가, 지금 아이들은 행복한가.

박수정/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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