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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언론인 정연주가 할일 / 김종철

등록 2008-05-22 20:40수정 2008-05-23 10:41

김종철  논설위원
김종철 논설위원
아침햇발
리영희·김중배·정연주 등의 논객들은 1995년 6년차의 올챙이 기자인 필자가 한참 줄어드는 수입을 무릅쓰고 <한겨레>로 기꺼이 직장을 옮긴 이유 중 하나였다. 정론직필의 대선배들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불행히도 한지붕 아래 있으면서도 누구와도 가깝게 일할 기회는 없었다.

‘조폭 언론’ 등의 신조어를 만든 스타 기자였던 정연주와 대화다운 대화를 처음 나눈 것은 2003년 어느날 그가 한겨레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을 때였다. 정신적 기둥을 잃는 것 같아, 동료 몇 명과 함께 그의 동네로 찾아갔다. 후배들의 간절한 호소로도 그의 결심을 돌리지 못했고, 얼마 뒤 그는 <한국방송>(KBS) 사장이 됐다. 이 시대의 훌륭한 글쟁이 한 사람이 또다시 아름답지 않게 퇴장하는구나 싶어 씁쓸했다.

정치권의 다툼으로 그가 도마에 자주 오르내릴 때는 기자 때의 올곧은 생각으로 올바르게 일해주기만 바랐다. 지난 대선 이후에는 이제는 그가 짐을 내려놓고 물러나는 게 낫겠다고 느꼈다. 그게 정연주 개인으로서도 더 험한 꼴을 당하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사내 노조 등의 거듭된 사퇴 요구에 맞서 임기를 끝까지 채우겠다고 버티는 모습을 보면서는 한때 맘속으로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요즈음 이명박 정부가 하는 짓거리를 보니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겠다”는 정연주가 옳다는 느낌이 든다. 어떡하든 정연주를 쫓아내려는 정권의 집요한 공작이 해도 너무하다. 한나라당은 ‘사퇴 0순위’로 올려놓고 연일 바람을 잡고 있으며,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물밑에서 압박하고 있다. 드디어 청와대의 ‘머슴’으로 변신한 감사원까지 동원됐다. 감사원은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정연주의 주리를 틀려고 할 것이다.

도대체 정연주의 힘이 얼마나 크기에 저러나 싶다. 그 답은 이 대통령의 멘토인 최시중 위원장이 내놓았다.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 하락이 정 사장 때문”이란다. 과연 사장 한 사람이 한국방송을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또는 케이비에스의 힘이 그렇게 큰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최 위원장의 말로 미뤄볼 때 현재의 한국방송이 최소한 정치권력과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 최근 보도를 보면 정부나 정치세력을 두둔하지 않는다. 쇠고기 개방 파문이나 공직자 검증 보도는 어느 매체보다 깊고 날카로웠다. 각종 시사프로그램도 모범적이다. 올해 들어 한국기자협회의 ‘이달의 기자상’을 세 번이나 받았을 정도다. 지난해에는 무려 열네 차례나 상을 탔다. 정권의 나팔수라는 과거의 오명은 확실하게 벗었다. 적어도 이 점은 매우 바람직하다.

이런 성취가 정연주 사장 덕분이라고 한다면, 기자나 프로듀서 등 공정방송을 위해 노력해 온 한국방송 사람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권 전체가 정 사장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을 보면, 오히려 국민에게는 그가 당분간 자리를 지키는 게 더 나을 듯싶다. ‘정연주 이후’가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다. 이 정부는 대통령 당선인의 언론 특보를 지낸 김아무개씨를 차기 사장으로 사실상 내정했다. 청와대 언론비서관이 취중에 뱉은 진담이다. 설령 정권의 방송 장악 의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사장을 하는 방송은 정권의 딸랑이 노릇을 할 가능성이 높다.

정연주가 사장으로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다. 한국방송이 영국의 <비비시>(BBC)처럼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중립지대에 남을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을 완성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정치권 들러리인 방통위부터 바꿔야 한다. 이 싸움에서 만신창이가 된다면 오히려 언론인으로서 영광이 될 것이다.


김종철 논설위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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