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주 학고재 주간
삶의창
단원 김홍도의 작은 그림 하나를 보다가 여행 떠나고 없는 아내가 불쑥 생각났다. 그림 제목은 ‘고승기호’인데 풀자면 ‘큰스님이 호랑이를 타다’다. 한눈에 봐도 해학적인 붓질이다. 단원은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귀엽게 그렸다. 그나마 털이 북실하고 뾰족한 발톱과 빳빳한 꼬리가 있어 맹수의 위용을 갖췄다. 호랑이 위에 탄 스님은 깍짓손을 하고 있고 주문을 외는 듯 표정이 자못 엄숙하다. 신선이나 스님이 호랑이와 함께 등장하는 그림은 흔하다. 온 절에 다 있다. 그러나 단원의 그림은 심상하지 않다. 화면 귀퉁이에 적힌 제발 때문이다. 글 내용이 신랄하다. 번역하면 이렇다. ‘작은 암자와 부들 깔개 하나면 수행에 부족함이 없거늘 구태여 신통력을 보이려고 호랑이 등에 걸터앉는가.’
그림을 찬찬히 뜯어봤다. 스님은 부들 대신 호랑이 등에 비단 방석을 두툼하게 깔았다. 그러고 보니 호랑이도 피식 웃는 낯빛이다. 꼭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릴 줄 알아야 고승대덕인가. 허름한 장삼가사를 걸치고 낡은 주장자를 잡아도 참 스님의 도력은 숨기기 어렵다. 단원의 풍자는 절묘하다. 한발 더 나아가니, 섬김을 강요하는 자는 모심을 받기 어렵다는 교훈도 보인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국민을 잘 모시려는 대통령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단원 그림은, 팔불출 소리 들을 각오하고 밝히건대, 내 아내의 모심을 떠올리게 했다.
아내는 며칠 전 친구와 함께 해외여행에 나섰다. 이렇게 길게 떠나기는 처음이다. 남편 곁을 잠시라도 비우는 걸 걱정하는 아내인데 모처럼 용심을 낸 모양이었다. 전날 숙취로 곯아떨어진 나는 아내를 배웅하지 못했다. 깨어보니 아내가 공항으로 떠난 뒤였다. 아침마다 먹을 밥과 입을 옷을 챙겨주던 아내였다. 아내가 사라진 이 변고에 나는 짜증이 먼저 났다. 내가 놀랐던 건 옷을 찾으려고 장롱을 열었을 때다.
옷걸이에 난데없이 번호표가 죽 붙어 있다. 1부터 10까지 번호를 단 옷걸이에 상하의가 짝을 맞춰 걸려 있었다. 나는 순서대로 입기만 하면 되는 셈이다. 장롱 바닥에 옷가지가 더 있었다. 열흘치 속옷과 양말, 손수건이 아래쪽에 따로 개켜졌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밑반찬 뚜껑에도 번호표가 붙어 있다. 이건 편식 잘하는 나를 우려한 지침이다. 식탁 위에는 메모가 있다. 과일은 어디에 있고, 열쇠와 통장은 어디에 있는지, 공과금은 언제 어디로 내야 하는지, 비상시 연락해야 할 곳은 어딘지, 빡빡하게 적혀 있다.
이쯤 되면 짜증낸 게 머쓱해야 옳다. 복에 겨워도 유만부동이지 호강이 턱에 받쳤다고 손가락질할 사람도 있겠다. 아닌가. 세상 모든 아내가 그렇다면 별나지도 않은 얘기를 한 꼴이다. 어쨌든 아내가 남긴 고마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의심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내가 평소 유난하기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었다. 아내는 도대체 나에게 뭘 원하는 것인가. 한없는 배려와 드넓은 아량으로 못난 남편을 깨우치려는 것인가. 차라리 악처의 학정에 신음하는 게 나는 낫다. 양처의 선정이 새삼 두려워진 날이었다.
아내가 돌아오면 말해야겠다. 남편 꼭대기에 오르면 혹 성인의 경지라도 보이느냐고. 호랑이 등에 타서 신통함을 과시해야 하겠느냐고. 그래도 못 알아듣는다면 덧붙여 서정주의 시 하나를 들려줄 참이다. ‘뻔디기’라는 시의 앞대목이다. ‘예수의 손발에 못을 박고 박히우듯이/ 그렇게라도 산다면야 오죽이나 좋으리오?/ 그렇지만 여기선 그 못도 그만 빼자는 것이야./ 그러고는 반창고나 쬐끔씩 그 자리에 부치고/ 뻔디기 니야까나 끌어 달라는 것이야.’
손철주 학고재 주간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