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신부
삶의창
필자가 살고 있는 공동체는 소백산 오지의 산촌이다. 우리 마을에 밤이 되면 불빛이라곤 없는 암흑천지다. 그런데 요즘은 밤마다 타오르는 불빛과 함성으로 가득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멀리 서울에서 들려오는 촛불집회의 불빛과 외침의 진동 때문이다. 필자는 한 번도 참가하지 못했지만 대부분 어린 중고생들이라 한다. 너무 정직하기 때문인지 자신들의 일그러진 우상의 언어로 절규한다. “나는 미국산 쇠고기가 싫어요!”
촛불은 어둠을 밝히는 데 쓰는 물건이다. 외침은 죽음 앞에 선 생명의 갈망이다. 한없이 밝고 단순하고 꾸밈도 거침도 없는 신세대 어린 학생들 마음에 도대체 무슨 어둠이 덮쳤기에 불을 밝히려 애를 쓰는 것일까? 그런데 사실 그들이 밝히고 싶은 것은 자신의 어둠이나 죽음이 아니라 우리 부모들 기성세대의 맹목과 무책임과 방관에 대한 질책으로 느껴진다. 그들의 눈에 미국과의 외교는 불평등하고 종속적이다. 천박한 동맹의식에 기초한 협상은 굴욕적이다. 더구나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은 대통령의 제1임무로 헌법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생명의 식탁을 그토록 가볍게 다루는 대통령이라니 어른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이건 아니거든요!”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살았어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한 약속을 어기고 열매를 따먹은 뒤 부끄러워 몸을 가리고 그늘 밑으로 숨었다. 어둠 속에 자신을 가둔 것이다. 하느님은 그때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며 모습을 드러내게 하셨다. 자기를 드러내면 참된 자신의 형상과 처지를 보게 된다. 혼돈의 상태에서 “빛이 있으라”는 말로 천지창조가 시작되었다. 어린 자녀들이 시청 앞 광장과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밤새워 목이 쉬도록 외치다 돌아오면 빛이 묻어 온다. 그 빛으로 인하여 부모는 참담함을 느낀다. 도서관에서 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어린 것들을 길거리로 내몰게 한 비정한 정치현실에 대한 책임과 죄책감 때문이다. 밤마다 어린 손에 밝혀 드는 촛불의 외침 앞에 녹슨 양심을 성찰하며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똑똑한 대통령 한 사람이면 국가경제를 살릴 수 있을 줄로 믿었다고.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돈 탓으로만 여겨 왔다고, 온갖 부도덕한 전과에도 ‘묻지마 지지’로 무엇인가에 홀렸음을, 그런 무책임한 결과의 죄과를 인정하겠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외칠 차례다.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무시하고 협정을 체결하는 민주주의 원리마저 부정하는 오만과 독선의 현실 앞에 이제 영혼의 황폐를 참담히 느끼고 있음을!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그래도 철학과 정신세계가 있어야 함을! 시대 과제를 볼 수 있는 눈과 비전, 그리고 보국위민의 역사의식이 있어야 함을! 무지 무능한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그를 뽑은 우리들 자신이다!라고 외치자.
어린 촛불 앞에 어른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났으니 부끄럽다. 어른이 제대로 못해서 아이들이 밤마다 어른들을 훈계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지금 이 땅의 지성이 할 일은 얼굴을 들 수 없이 더 부끄러워지고 깨져야 한다. 그런 연후에 정치적 과제들을 챙기는 것이다. 대통령이 마약이나 낮술에 취한 채 운전석에 앉아 있지는 않은지 감정과 음주 측정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이미 밝힌 촛불에 어둠이 가시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거대한 불이 타오르게 될 것이다. 빛이 과열되면 화염이 된다.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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