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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흔들리는 체스판 / 김지석

등록 2008-08-21 21:00

김지석  논설위원
김지석 논설위원
아침햇발
그루지야는 작은 나라다. 한반도 3분의 1 크기에 5백만명이 채 안 되는 인구가 산다. 위쪽은 카프카스 산맥에 막혀 있고, 서쪽은 흑해와 닿아 있다. 우리나라는 이 나라가 옛소련에서 독립한 다음해인 1992년 수교했으나 별도 대사관은 두지 않고 우크라이나 주재 대사가 겸임한다.

그루지야가 최근 지구촌 뉴스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지정학적 위치 탓이 크다.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끼여 있는 이 나라는 지리적으로 유럽의 동남쪽 끝에 해당한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이 러시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주요 수단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확대인데, 샤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은 나토 가입을 추구한다. 미국이 과거 옛소련권을 겨냥해 만든 나토에는 지금 옛소련권 10개 나라가 들어가 있다. 이 가운데 체코와 폴란드에는 러시아를 겨냥한 미국의 미사일 방어 기지가 설치될 예정이다. 그루지야에도 미군이 배치되는 것은 러시아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악몽이다.

미국의 전략전문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1928~)는 미국이 21세기에도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할지 여부는 유라시아 대륙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달렸다고 말한다(<거대한 체스판>). 세계 인구 및 에너지 자원의 4분의 3과 총생산의 60%를 차지하는 유라시아 대륙은 크게 4개의 판으로 나뉜다. 서부(서유럽), 중부(러시아·동유럽·중앙아시아), 남부(중동·남아시아), 동부(동아시아)가 그것이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남으려면 다음 강국인 중국·러시아·독일 등의 영향력이 각 판을 넘어서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중부와 남부 판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는 그루지야의 확보가 미국에 중요한 까닭이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이번 그루지야 진입은 미국의 뜻이 관철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

미국의 유라시아 전략은 남부에서도 이미 실패하고 있다. 남부의 왼쪽 절반을 차지하는 중동지역에서 가장 큰 나라는 터키와 이란이다. 미국으로서는 터키와 이란을 끌어들여 두 나라가 서로 협력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익이 된다. 그런데 미국은 거꾸로 이란에 대해 비현실적 적대 정책을 계속한다. 게다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는 대규모 미군 병력이 오랫동안 묶여 있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적극 협력해온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의 최근 사임은 미국의 중동 전략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시간과 여론 모두 미국 편이 아니다.

미국과의 관계가 그나마 무난한 지역은 동아시아다. 다른 지역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한 것이 중요한 이유다. 미국은 중국을 무리하게 봉쇄하려 하기보다 견제와 협력을 병행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것은 이런 현실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북한 핵 문제에서도 늦게나마 협상 노선으로 돌아서 진전을 보고 있다. 본격적 핵 폐기와 다자안보기구 출범 논의가 시작되면 금세기 들어 미국 외교의 최대 성과가 될 것이다.

지금 유라시아라는 체스판은 곳곳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 책임의 많은 부분은 공세적·군사적 대외정책에 치중해온 미국에 있다. 유라시아 대륙이 안정되려면 미국이 먼저 정책 기조를 바꿔야 한다. 브레진스키가 제안한 범유라시아 안보체제(TESS) 구축이 한 방법이다. 미국이 유라시아 나라들의 지역적 주도권을 막으려고 군사력을 동원하는 소모적 일을 그만두고 미국에 협조적인 큰 틀의 안보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미국이 목표조차 불분명한 나토 확장 대신 러시아가 무난하게 참여할 수 있는 새 안보 틀을 만들었다면 지금과 같은 그루지야 사태가 생겼을까.

김지석 논설위원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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