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논설위원
아침햇발
기어이 밀어붙일 모양이다.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작업 말이다. 역사학계의 거센 반대와 국사편찬위원회(국편위)의 난색에도 불구하고 교육과학기술부는 ‘역사교과서 전문가협의회’라는 기이한 팀을 급히 만들었다. 직접 나서서 수정안을 마련하겠다는 뜻이다. 앞으로 출판사와 교과서 집필자를 윽박지르는 일만 남았다.
교과부의 애초 계획은 국편위가 교과서 수정이라는 ‘역사적 대임’을 맡는 것이었다. 국편위가 이런저런 부분은 수정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주면 모양새를 그런대로 갖출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전문가들이 포진한 국책 연구기관에서 낸 결론 아니냐며 밀어붙일 심산이었다.
모호하기는 하지만, 국편위는 상부의 이런 주문을 들어주지 않았다. 역사 교과서 서술 방향에 대한 포괄적이고 원칙적인 의견만 밝혔을 뿐 뉴라이트 등이 수정을 요구한 250여개의 구체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정부 검정을 통과한데다 2004년에도 한 차례 자신들이 검토해 문제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교과서에 대해 다시 구체적인 의견을 내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또 구체적인 수정 요구 자체가 교과서 검인정 제도를 흔드는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술 방향이라는 보고서의 내용을 두고 논란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교과서 수정 방식 등에 대해 사실상 반대 의견을 낸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실용적인 정부라면 이쯤에서 마땅히 자신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외부 전문가뿐 아니라 내부 전문가조차 반대하는 일이라면 뭔가 큰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부 전문가를 대표하는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이 누군가. 학자로서의 올곧은 자세와 비정치적인 처신,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역사 해석을 존중해 이 대통령이 직접 임명장을 준 사람이 아닌가.
근현대사가 뉴라이트 진영에서 주장하듯이 ‘좌편향’인지 아닌지를 새삼스럽게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역사 해석이다. 단선적인 시각만 가르치는 국정 교과서와 달리 이러한 다양한 역사 해석을 포용하는 것이 바로 검인정 교과서 제도이다. 다른 선진국이 모두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열린 역사교육이 사회 발전이나 미래 방향과도 어울리기 때문이다.
뉴라이트처럼 현재의 교과서가 편향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검정 교과서 제도는 이들에게도 문호가 열려 있다. 자신의 관점에서 교과서를 써서 검정을 받으면 된다. 그 다음 그들이 최상으로 여기는 ‘시장’에 맡기면 된다.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이 얼마 전에 출판한 ‘대안 교과서’를 다듬어서 검정에 제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일본의 우익이 모범을 보인 바 있다. 기존의 역사 교과서가 자학사관에 기초한 것이라고 비판(여기까지는 우리나라 보수진영과 같다)한 일본 우익은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만들어 독자적인 검정 교과서를 쓰는 방식을 택했다. 우편향적이고 왜곡된 시각 때문에 학생들한테 외면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들은 검정 체제라는 틀은 존중했다. 우리처럼 정치권력을 동원해 다른 시각의 교과서를 훼손하는 비민주적이고 몰상식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사실 성숙하지 못한 보수세력보다 정부가 더 큰 문제다. 정부가 일부 우편향적인 사람들의 주장만 듣고 정상적인 규정과 절차, 전문가의 식견까지 깔아뭉갠 채 교과서 수정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심각한 편향이자 질서 파괴다. 아무래도 이 정부에 최소한의 상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듯싶다.
김종철 논설위원phillkim@hani.co.kr
김종철 논설위원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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