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특파원
15일 오후 1시쯤 도쿄 지요다구 구단시타 역에서 내려 야스쿠니신사 쪽으로 향했다. 100m가량 떨어진 좁은 도로에는 지난해 8월15일 봤던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고노 담화 백지화를 요구하는 모임’ ‘외국인 참정권을 반대하는 모임 전국협의회’ 등 10여개 우익단체 회원 100여명이 외국인 배척과 중국의 티베트 탄압 비난 구호 등을 외치며 서명운동을 펼쳤다. 신사 입구 바로 앞에서는 새로운 광경도 눈에 띄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회원 10여명이 “민주당은 매국노의 소굴”이라는 현수막을 펼친 채 제1야당인 민주당 비난에 열을 올렸다. 오는 30일 총선에서 집권 가능성이 높은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 등 당 집행부가 새로운 국립추도시설 건립을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을 공격한 것이다. 이런 ‘위기감’ 때문인지 이날 우익단체들은 전에 없이 거친 행동을 보였다. 이날 오전 10시 ‘반전공동행동위’라는 단체 회원들이 야스쿠니신사 주변에서 반대행진을 하자 참배를 마치고 나온 ‘일본국정당’ 회원들이 달려들며 30분간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오후 3시께 우익들의 마무리 집회. 이들의 목소리와 구호는 더욱 과격해졌다. “중국이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반대한다면 국교를 단절하면 된다.” “범죄인 지나인(중국인을 낮춰 부르는 말)과 조선인은 일본에서 쫓아내자.”
신사 밖 풍경과 달리, 안에서는 지난해 이맘때처럼 차분했다. 우익단체 회원들이 일장기를 앞세우고 줄을 맞춰 참배하러 가거나, 옛 일본군 복장을 한 노인들이 참배를 마치고 행진하는 모습은 이곳이 야스쿠니임을 실감케 했다.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새로운 풍경 하나 더. 일본 뉴스전문 사이트 <제이피 뉴스>는 아침 7시부터 현지 상황을 실시간으로 여덟 차례나 중계했다. <제이피 뉴스>는 참배객의 목소리를 날것으로 전했다.
“한국과 중국 사람들 입장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로서도 오빠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반대를 너무 하니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80살 할머니)
“야스쿠니는 나 혼자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같이 싸운 전우를 위로해주는 장소다.”(87살 할아버지)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 우리와 비슷하게 반미를 주장하는 한국의 진보세력을 만나서 야스쿠니신사 문제에 대해 눈치 보지 않고 대토론을 해보고 싶다.”(신우익단체인 ‘잇스이카이’ 대표)
그러나 야스쿠니신사 안팎의 풍경만이 8·15를 맞는 일본이 아니다. 지난 9∼11일 사흘간 연속 방영된 3부작 다큐멘터리 <엔에이치케이(NHK) 스페셜-일본 해군 400시간 증언>(<한겨레> 15일치 2면)은 옛 일본 해군 핵심 참모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무모한 전쟁이 왜 벌어졌는지를 추적해 눈길을 모았다. 1부 ‘해군 있고 국가 없음’ 마지막에 프로그램 진행자는 이렇게 말했다. “각자가 자신의 일에 매몰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보지 못한 장교들의 자세가 ‘해군 있고 국가 없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에 주저함을 느낀다. 전 장교들이 고백한 전쟁에 이르는 프로세스는 지금 사회가 안고 있는 그 문제이고, 나 자신도 그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전후 일본을 지배해온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가 끝나갈 조짐이다. 야스쿠니 대체시설 건립을 내세운 민주당이 진정으로 전쟁의 반성과 교훈을 살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도형 특파원aip209@hani.co.kr
김도형 특파원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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