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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가르치길 포기해야 교육이 가능하다” / 신기섭

등록 2009-09-28 21:37

신기섭  논설위원
신기섭 논설위원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을 이렇게 저렇게 분석한 자료들이 최근 잇따라 나왔다. 대체적인 결론은, 부모의 재산(또는 사회적 지위)과 자녀의 점수가 일정한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볼 때마다 가난한 이들은 절망한다. 빈곤의 대물림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하지만 기억할 것이 있다. 어떤 일에서든 ‘돈 있고 힘 있는’ 이들과 같은 방법을 써서는 어차피 그들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지배 이념을 완전히 뒤집는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

지난해 국내에 번역 출판된 프랑스 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책 <무지한 스승>은 19세기 초에 기존 교육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도입했던 프랑스 교육자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 이야기다. 자코토는 1818년 네덜란드어를 한마디도 못하면서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가 한 일은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을 반복해서 읽게 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학생들은 이 방법을 통해 유창한 수준에 도달했다.

자코토와 비슷한 때에 살았던 영국 교육자 조지프 페인(Joseph Payne)의 책을 보면, 자코토의 교육법을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페인은 1830년 <자코토 교수의 유명한 교육 체제의 원칙과 실재에 관한 간략한 소개>(A Compendious Exposition…)라는 책을 썼다. 페인은 자코토의 수업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다.

자코토는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편 뒤 ‘칼립소의 슬픔’으로 시작하는 첫 구절을 자신이 읽고 학생들에게 따라 읽게 한다. 먼저 ‘칼립소’라고 읽고 따라 읽게 한 뒤, 이어서 ‘칼립소의’라고, 다시 ‘칼립소의 슬픔’이라고 읽고 따라 읽게 한다. 따라 읽기 이후의 공부는 모두 학생들 몫이다. 학생들은 책의 다른 부분에서 ‘칼립소’, ‘의’, ‘슬픔’을 찾아보고 다른 단어들을 비교·관찰하면서 스스로 ‘연구’했다. (프랑스어를 배우는 데 드는 시간도 다른 학습법의 10분의 1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방법의 핵심은 한 가지를 철저히 익히고 나머지는 이렇게 익힌 내용과 연관시켜서 분석·이해하는 것이다. ‘먼저 하나를 외울 때까지 읽는다. 그리고 이것에 비춰, 새로 접하는 부분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을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분석 결과를 일반화한다.’ 어린 학생들이 혼자 하기 불가능한 작업 같지만, 자코토는 10~14살 정도면 누구든 추상적인 개념까지 혼자 알아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페인은 말한다.

자코토는 모든 사람의 지능이 평등하며, ‘똑똑한 이’(스승)가 ‘무지한 이’(학생)를 가르치는 방식으로는 ‘지적 해방’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르치길 포기해야 진정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스스로 깨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돈도 없고 능력도 안 돼 어쩔 줄 모르는 부모와 참된 교육을 고민하는 교사에게는 ‘복음’과 같은 소리가 아닐까.

지금이야말로 자코토의 교육법을 진지하게 연구해 볼 때다. 페인의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인터넷(books.google.com)에서 원본을 거저 내려받을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시험 점수를 크게 올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학생들을 독립적인 사람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라면 ‘힘 있고 돈 있는 스승들’의 말에 쉽게 속지 않을 것이다. 또 이들이 주역이 될 때, 많은 사람이 갈망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이룩될 것이다.

신기섭 논설위원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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