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언론인
북한에서 3대에 걸친 권력 세습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시절,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김정일 당비서가 새 지도자가 된 것과 관련하여 북한 관리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때 ‘세습’이란 표현을 쓰자 그들은 화를 내면서 그렇지 않음을 강조했다. 김정일 당비서가 오랜 기간 지도자 수업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기에 새 지도자가 된 것이지, 김일성 주석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 새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20대 청년 김정은’이 어느 날 홀연히 ‘대장’이 되고, 노동당의 핵심 간부가 되는 최근 사태에 대해 그들은 어떤 논리를 펼지 참 궁금해진다.
북한 인민들 처지가 너무 가슴 아프다. 20대 청년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준비를 할 게 아니라, 최소한 집단 지도체제 등 ‘왕조적 세습’이 아닌 새 지도체제를 준비하면서, 인민의 정치적·시민적 자유와 권리를 확대하고, 경제적 삶도 제대로 보장하는 그런 과정으로 가야 할 때가 아닌가. 20대 청년에게 권력 세습을 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삶보다는 권력의 안정화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될 터인데, 이로 인한 대가와 고통은 인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 시대, 그런 종류의 권력 유지는 늘 불안하기 마련이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가득하니, 북녘 땅은 물론이려니와 한반도 전체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일수록 절실한 과제는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일이다. 이명박 정권 이후 취해온 강경 일변도의 대북 정책은 이미 그 바닥이 다 드러났듯이 한반도의 안정적 관리에 치명상을 입혀 왔다. 남북 사이 신뢰도 모두 무너지고, 더욱이 일방적 대미 종속과 편향으로 중국·러시아와의 관계까지 악화됨으로써 한반도가 이들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지금 남북관계도 그렇고, 한반도 주변의 정세는 새로운 냉전시대로 접어든 듯 각축과 대결, 분쟁과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 영토 분쟁도 심상치 않고, 중국과 미국 사이 환율과 자원을 둘러싼 긴장감도 예삿일이 아니다.
이런 신냉전 구조 속에서 북쪽은 북쪽대로 권력 세습 문제로 옹색한 처지가 되면서 중국에 매달리고 있다. 남쪽은 남쪽대로 대미 일방주의와 대책 없는 대북 강경책으로 스스로 출구를 닫아 왔다. 남과 북이 모두 주도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서도 한반도의 안정적 관리와 남북 사이 최소한의 신뢰와 대화 통로를 열어 놓기 위해서는 인도적 지원의 길을 터서 이를 이어가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인도주의는 냉전 대결도 뛰어넘을 수 있고, 정치적 대결로 인한 긴장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 특히 올해 태풍과 홍수로 인해 북한의 식량 사정은 더욱 절박해졌다. 오죽했으면 북쪽이 남쪽에다 식량지원 요청을 했을까. 그런데 이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대응은 참으로 옹졸했다.
냉전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던 80년대 초,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불렀던 강경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도 “굶주림은 정치를 모른다”며, 대기근에 시달리던, 당시 소련의 위성국인 에티오피아에 대해 대규모 인도적 식량지원을 했다.
남쪽에는 쌀이 너무 많아 엄청난 저장비용이 들어가는 이런 상황에서, 남쪽 농민에게도 좋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북녘 동포를 도와줄 수 있는 이런 윈윈의 일에 대해서조차도 제대로 된 비전도,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도,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없는 것 같다. 소망교회에서 이웃 사랑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다.
때마침 남북 이산가족 만남에 조그만 숨통이 트였다. 이를 계기로 적어도 인도적 지원 문제만큼은 대담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와 교류·협력의 길을 터서,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국가를 보위’해야 하는 대통령의 기본 의무다.
정연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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