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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연주 칼럼] 엠마오로 가는 길

등록 2012-12-30 19:27

정연주 언론인
정연주 언론인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뒤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끝도 모를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 절망은 곧 죽음이었다. 예수의 죽음, 예수가 상징하던 구원의 죽음이었다. 이스라엘 민중에게 예수는 영혼의 구원뿐 아니라 로마의 지배, 유대 종교 기득권 세력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예수는 종교적 정치적 메시아였다.

그런데 그는 힘없이, 무참하게 죽었다. 고문을 당하고, 온갖 능욕과 모멸을 받으며 죽었다. 제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다.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예루살렘을 떠나 시골로 도망을 갔다.

엠마오로 가는 길. 예수를 따르던 두 사람이 예수 죽음 이후 절망에 빠져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깊은 절망에 빠져 있어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이, 곧 죽음을 넘어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벌써 다섯명의 노동자, 노동활동가가 죽어갔다. 네 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절망의 깊이가 얼마나 되었기에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한진중공업 노조 간부 최강서씨는 노조 파괴와 158억원 손해배상소송이라는 악령 같은 고문에 시달려왔다. 선거 결과는 그런 ‘악령’으로부터의 해방이 좌절되었음을 뜻했을 터다. “박근혜 대통령 5년을 또…”라고 채 말도 끝내지 못했던 그의 유언은 끝 모를 그 절망의 깊이를 조금 헤아리게 할 뿐이다.

최강서씨만이 아니다. 대선 이후 목숨을 끊은 분들뿐 아니라 선거 전, 쌍용자동차 해고자와 가족 가운데 스물세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는 선거 전 ‘죽음’의 경고를 여러 차례 했다.

“쌍용 해고노동자들이 지난 3년 동안 20명 넘는 사람이 죽었어요. 이들은 마지막 희망을 잡다가도 기력이 달리고, 지탱할 힘이 없는 것 같아요. 대선 결과에 따라서 죽을 사람이 더 있다고 느껴져요. 우리나라에서 밀려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번 선거는 목숨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은 아니라 하더라도 끝 모를 좌절과 절망을 느끼는 이들, 사회적 강자, 권력, 자본에 밀리고 쫓겨나 차가운 벌판에서 벌거숭이로 서 있는 이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하여 사법 고문의 대상이 되고, 평생의 일터에서 쫓겨나고, 갖은 불이익을 당하는 이들이 주변에도 넘쳐난다.

그들에게 “유신 때는 끝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바위에 계란 던지는 심정으로 싸웠다. 희망의 씨앗을 심기 위해, 아니 그게 최소한 사람 사는 도리였기에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역량만 잘 키우면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 보궐선거도 있고, 지자체 선거도 있고, 총선도 있고, 5년 뒤에는 또 대선도 있다”는 말을 해본다. 그러나 이런 말이 지금은 위로가 되기는커녕 속만 뒤집어 놓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달리 할 말도 없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의 두 사람을 포함하여 예수를 따르던 이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참담한 실패였다. ‘메시아 예수’의 모습은 찬란한 승자의 그것이 아니라, 죽음의 바닥에까지 떨어지는, 고난과 절망, 실패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이렇게 바로 그 바닥에까지 이른 고난과 절망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그게 ‘메시아 예수’가 보여준 구원의 모습이었다.

이제 절망과 좌절을 딛고, 희망의 씨앗을 다시 가꾸어 가야겠다. 그리고 그 희망의 출발은 함께 나누는 것, 특히 아픔과 슬픔과 절망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해고자들, 가진 자들과 강자들이 난폭하게 지배하는 이 시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 뿌리가 뽑힌 이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다시 일어서는 일이다. 부족한 것을 서로 채워주고,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해고노동자를 위한 기금에 도움을 주고, 왜곡된 언론조건을 바꾸기 위해 힘들게 일하고 있는 많은 독립언론들을 열심히 도와주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정말 죽지 말고 힘차게, 당당하게 살면서 이겨내는 일이다.

정연주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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