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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체벌 없는 교실 / 황현산

등록 2011-01-07 21:47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한 학생이 연필 한 자루를 도둑맞았다. 교사는 교실의 문을 닫아걸고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했다. 모두 눈을 감으라고 했다. 연필을 훔쳐간 학생은 손을 들라고 했다. 손을 들면 벌써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 것이니, 연필만 돌려받고 일체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부드럽고 엄숙하게 말했다. 시간이 무겁게 흘러갔으나 손을 드는 학생은 없었다. 굳어지는 어깨라도 잘못 움직였다간 도둑으로 몰릴까봐 몸을 떠는 소심한 아이도 있었다.

교사는 마침내 반장을 불러내서 둘이 함께 학생들의 소지품을 검사했다. 바닷가의 가난한 마을에 사는 한 아이의 책보따리에서 그 연필이 나왔다. 선생은 비의 자루를 뽑아들고 그 아이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학생은 책상 사이로 기어서 몸을 피했으나 매는 등허리와 어깨에 사정없이 떨어졌다. 아이가 두 손을 비비며 소리질렀다. “미역 갖다줄 게 때리지 마세요. 김 갖다줄 게 때리지 마세요.” 선생은 몽둥이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 학교가 파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교무실에 다녀온 반장이 집에 돌아가도 된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우리 반 교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가난했던 시절이다.

몇 해 전 초등학교 동기 모임에서 친구들이 모여 옛추억을 꿰맞추는데 서로간에 기억이 같지 않았다. 그러나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는 모두 그 세부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너나없이 그 사건에서 받은 충격과 상처가 그렇게 컸던 것이다. ‘미역’과 ‘김’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를 맞던 동무에게 선생은 산림감시반원이나 밀주 단속을 나온 세무서원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온갖 핑계로 돈을 뜯어가던 주재소의 경찰처럼 달래야 할 사람이지 존경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떨어진 매가 자신의 소행 탓이 아니라 알맞은 방법으로 권력자의 환심을 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교육현장에서 체벌을 금지하라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지시가 떨어진 뒤 그에 관한 찬반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위의 이야기가 이 논의를 위한 적절한 예가 될 수 없다는 점은 나도 물론 알고 있다. 그것은 한 교사의 체벌 사건이라기보다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한 아이가 벌인 생존투쟁의 참극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그날의 교실이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의 한 면을 미리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교육의 문제가 거기 숨어 있다. 우리는 어린 마음에도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포함한 내 동기들의 삶을 놓고 그 행불행을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오랫동안 ‘우리는 안 돼’라는 식의 패배주의를 안고 살아온 것은 사실이다.

체벌 없는 교실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달 전에도 한 중학교 교사와 체벌 금지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실력과 인품과 열정을 두루 갖춘 젊은 교사다. 노력하겠지만 성공할 자신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중고등학생들의 사회는 ‘동물의 세계’라고도 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한국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체벌에 의지하는 교육을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난폭한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야 할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초등학교 시절의 교실이 우리 동기들의 자아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듯이, 지금의 교실도 학생들이 앞으로 살게 될 세상의 그림이 아닐까.

학생들에게 언제까지나 폭력은 폭력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다거나, 맞지 않고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남들이 벌써 하는 일을 우리만 불가능하다고 처음부터 패배주의에 젖어 있을 이유는 없다. 우리 사회의 지성을 총동원하여 체벌 없는 교실을 상상해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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