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병이 전하는 메시지

등록 2011-01-14 21:18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항암치료를 받았던 친구의 이야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던 어느 날, 아픈 아기를 안고 소아과 외래진료실을 드나드는 젊은 엄마들이 발산하는 생명력이 눈부시게 다가왔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렬한 에너지는 바로 아기 업은 엄마들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그녀. 자신이 곧 떠날지도 모를 이 세상의 모든 젊은 엄마들과 아기들을 향해 아낌없는 축복을 보냈다. 그 순간, 섬광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가 제각각 빛나고 있음을 보았다. 풀, 막대기, 벌레, 쓰레기같이 하찮게 여겼던 것들에도 나름 존재의 의미와 이유가 있었다. 결국 세상에 하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굳이 병을 이겨내고 꼭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 주어진 시간을 시시각각 음미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그 후 그녀는 회복되어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안타까운 건 환자 시절 누렸던 일상의 행복감을 온전히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이란다. 새로운 하루가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지에 전율했던 감수성을 잃어가는 자신에 대해 조바심을 낸다.

또다른 친구는 어느 날 밤 치통의 기습을 받았다. 통증으로 귀까지 터질 것 같던 지옥의 하룻밤을 보내고 달려간 응급실에서 진통제 3대를 연거푸 맞은 다음에야 치통은 진압되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연락을 끊고 지냈던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서운한 감정이 풀리지 않았던 차, 엉뚱하게 치통이 그 모든 미움과 원망을 씻은 듯이 날려주었다니. 격렬한 통증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올 것임을 그 어느 때보다 실감했단다. ‘그날’이 오면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통증이 유발한 뜻밖의 효과. ‘세상에 용서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우리 모두는 그가 치통 덕분에 너무 손쉽게 득도할까 걱정했다.

굳이 종교생활자가 아니라도 병이 때때로 우환을 위장한 축복임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큰 병에 맞서 몸이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동안 마음은 극심한 두려움으로 평소보다 두 배 이상 겸손해진다. 그간 살아온 방식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이 시점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자각할 때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게 되기도 한다. 잔소리를 일삼는, 늙으신 엄마와 마주앉아 시래기된장국에 따뜻한 밥을 말아 먹는 저녁 한때로 돌아가고 싶어 가슴이 터질 것 같다는 어느 선배. 아프지 않았다면 그런 그리움이 가슴에 고일 수 있었을까? 그간 세상에 대고 너무 많이 투덜대고 불평했기 때문에 병이 찾아온 것 같다고 그는 분석한다. 선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꿈꾸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남을 비판하고 채점했던 자신의 기준이 오만했음을 인정했음은 물론이다. 태풍이 바다밑 칙칙한 녹조를 단번에 걷어내 버리는 것처럼 큰 병이 오래 쌓인 분노와 울분, 억울함이나 적대감 같은 마음속 노폐물을 단숨에 날려버려 주었던 것일까? 이제 그의 목표는 잘 웃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큰 병 앞에 모두 억울해한다.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병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바꾸는 이들이 있다. 마치 큰 병에 담긴 메시지를 해독해 낸 것처럼 말이다. 결국 암 선고란 세상을, 자신의 삶을 지금까지와 달리 보라는 편지 같은 것일까? 겸손해지거나, 너그러워지거나, 가진 걸 나누려 하거나, 그들은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으로 주변을 놀래킨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존재를 축복하는 마음가짐이 생기기도 한다. 병은 결국 성장통이었음이 드러나며 지금까지 닫혀 있던 다른 쪽 문이 열린다. 이건 아프기 전과 다르게 살아보리라 결심한 이에게만 쏟아지는 축복이다. 병이 우리에게 새 문을 열어줄 때 우리는 그 문으로 들어가야 하리라.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1.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어준석열 유니버스’ 너머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2.

‘어준석열 유니버스’ 너머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햄버거집 계엄 모의, 조악한 포고령…국가 위협한 ‘평균 이하’ 3.

햄버거집 계엄 모의, 조악한 포고령…국가 위협한 ‘평균 이하’

[사설] 탄핵 찬성 의원에 ‘배신자’, 국민의힘은 어디로 가려 하나 4.

[사설] 탄핵 찬성 의원에 ‘배신자’, 국민의힘은 어디로 가려 하나

윤석열, 극우 거리의 정치 올라탈까…트럼프식 부활 꿈꾸나 5.

윤석열, 극우 거리의 정치 올라탈까…트럼프식 부활 꿈꾸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