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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두 국사 선생 / 황현산

등록 2011-02-11 19:47수정 2011-02-12 03:36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정부와 여당이 국사교육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국사교육을 폐지하다시피 한 것이 이 정부와 여당인데, 그사이에 무슨 바람이 어떻게 불었는지 알 길이 없다. 국사교육과 관련하여 이런 소동을 겪으면서 나는 내가 만난 국사 선생들 가운데 두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중요하지도 않고 유명한 사람들도 아니지만, 우리의 국사관 속에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두 가지 극단적인 이데올로기를 그들이 우의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의 국사 선생이다. 말과 행동이 빨라 제트기라는 별명이 붙었던 이 선생은 젊고 의기 높은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으며, 그 통일이 고구려에 의해 이루어졌으면 만주 대륙이 우리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선생의 말은 어린 학생이었던 내 피를 끓게 했지만, 한 가지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 당시 당나라가 한반도와 만주를 모두 병합하여 그 상태가 지속되었더라면 중국 대륙이 모두 우리나라가 아닐 것인가. 우리는 중국인이 되어 있을 것이며, 이 땅의 사람들이 모두 중국어를 사용할 것이다. 중국 대륙이 모두 우리나라라는 생각은 솔깃했지만, 내가 중국인이 되는 것은 싫었다. 그 가상의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와 만주에 걸치는 거대한 나라를 건설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풍속과 문화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언어도 다를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소월의 시는 없을 것이다. 아니 사람살이 형편이 달라지고 서로 사귀는 범위가 달라졌을 것이니,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소월이라는 재능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힘으로 이 땅에 지금보다 더 부강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이룩되어, 거기서 수많은 다른 재능이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나라가 ‘내’ 나라일 수는 없는 것이 확실했다. 고구려가 건설했을 큰 나라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기를 바란다는 생각과 무엇이 다를까.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 나라의 역사가 어떤 역사이건 이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때에도 할 수 있었다.

근년에 만난 국사 선생은 사실 국사 선생으로 짐작되는 사람이다. 국립박물관의 고려청자 전시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중학생과 인솔교사가 들어왔다. 그때 나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이 도자기들은 고려의 도공들이 억압 속에서 노예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으며, 차라리 증오해야 할 물건들”이라고 그 젊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단언했던 것이다.

도공들이 뼈저린 고통 속에 살았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신분은 비천했으며 그들의 작업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제 손목을 자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비록 노예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이룩한 작업의 가치를 그 생산제도의 성격으로만 따질 수 있을까. 도공들이 그 아름다운 그릇들을 억압과 고통 속에서, 원한과 분노 속에서 만들었지만, 도공들은 또한 그 도자기를 통해 자기 재능을 실현하고, 자기가 살고 싶은 세계에 대해 그 나름의 개념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소망이 없었다면 도공들은 그 아름다움을 어디서 끌어왔겠는가. 그리고 그 소망은 우리의 소망이 아닐 것인가. 그 교사는 도공들 편에 서서 말한 것이 아니라 도공들을 모욕한 것이다.

역사는 과거와 나누는 대화라고 흔히 말한다. 유령의 역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편협한 주관성으로 역사의 입을 틀어막고도 대화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이번 국사교육 번복 소동에서 보듯이, 역사의 입을 막았다 열었다 하며 그 눈치를 보는 사람들의 이상한 대화법이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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