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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모녀들의 점심 데이트 / 박어진

등록 2011-02-18 18:35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박어진
서울셀렉션 기획실장
엄마 셋과 딸 셋이 모였다. 사회 친구 사이인 50대 엄마들과 20대 중후반의 딸들이다. 장소는 30년 넘게 드나든 인사동 골목, 가히 강북지역 최고 내공의 맛집이다. 동그랗게 둘러앉아 합동 맞절로 세배를 겸해 초면 인사를 치른다. 맑은술 한잔에 굴보쌈, 낙지데침에 고기완자, 게장까지 신나는 밥상, 이제는 수다판이다.

딸 셋 중 둘은 곧 출국한다. 한 친구의 딸은 미술 전공. 휴학하고 뉴욕에서 어학연수 겸 온갖 현실 연수를 위해 반년 동안 있을 예정이란다. 생활비며 어학연수까지 모든 비용은 싱글 엄마가 맡지만 학교보다 더 큰 학교인 세상 속으로 딸을 보내는 엄마는 담담해 보인다. 다른 친구의 딸도 미술 전공. 1년 후 대학을 졸업한 뒤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는 구상을 밝힌다. 졸업이 늦어진 건 그간 여러 대학을 옮겨다니며 자기 세계를 구축해온 독자 행보 덕분. 사업 아이템은 오랫동안 구상해 왔지만 아직 미정이란다. 온라인숍이든 뭐든 자기 일을 해보고 싶다니 그의 예술적 안목이 장착될 사업 내용을 기대해 본다. 내 딸은 지난 연말 직장을 그만두고 집 짓는 해비타트 자원활동가로 3월 초 떠난다. 예전엔 외국인 유학생 지원업무를 맡아 하더니 국제연대 같은 네트워킹이나 배후지원 분야에 적성과 관심이 일치하는 모양이다. 1년 동안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집 짓는 일과 관련해 지원업무를 맡을 예정이라나. 왕복 항공료와 현지 체재비 정도 급여를 받으며 나머지는 자기 부담이다. 그러니 직장 다닐 때 조금 모아둔 통장의 잔고를 의식하며 벌써부터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또래의 당연한 관심사인 남자친구, 결혼, 아이 등등 현안에 대해서도 딸들은 거침없이 말한다. 일년 동안 남자를 골라 사귀고 결혼해서 아기 다섯을 낳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불타는 애국심이 즉각 칭송된다. 딸이 낳을 아기들을 1년씩 키워야 할지 2년까지 키워야 할지 고민하는 엄마들. 한 아이당 최대 2년까지 키워준다고 한 친구가 선언하자 다른 엄마들은 반발한다. 손주를 키워야 할지 말지, 그 경우 양육 기간은? 정말이지 민감한 사안이다. 엄마와 딸 사이 엇갈리는 이해관계 토론은 건강한 모녀관계를 입증하는 거겠지.

된장찌개에 누룽지까지 먹고 나니 찻잔이 놓인다. 평소 딸들에게 요청받지도 않은 조언을 일삼았던 엄마라는 직업의식이 작렬할 차례. 지리적 국경이 예전처럼 견고한 경계선이 아닌 시대를 사는 후배들이기도 한 딸들에게 한 친구는 ‘남들과 다르게 살라’고 주문한다. 조직의 부품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독립군’으로, 프리랜서로, 외롭고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개발하고 개척해 내라는 요청이다.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면서 젊은 그녀들이 듣는다. 그 친구는 또 말한다. 지상에서 개인의 존재가 외따로 떨어져 제각각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자신을 키워낸 지역의 풍토와 지리, 언어와 유전자 그리고 시대와 민족적 배경이라는 거대 맥락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라는 이야기다. 결국 나와 세상 만물이 함께 연결되어 존재하는, 바로 그 존재의 그물망을 바라보라는 거다.

우리는 물론 안다. 젊은 날 우리가 저질렀던 실수와 실패의 상당부분을 딸들 또한 겪어낼 것임을. 사랑의 실패, 그리고 때로 지뢰밭이 되어버리는 조직 내 인간관계 속에서 받을 상처를 겪으며 그녀들은 성장할 것이다. 실패를 통해서만, 상처를 통해서만 성장하는 부분이 있음을 우리는 이미 안다. 그렇다면 딸들이 실패 없이 세상 살기를 바라는 엄마로서의 조바심을 놓아야 할 일이다.

맛있고 행복한 밥상 앞에 모여든 딸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그들의 세상을 만들어내기를 꿈꿔본다. 즐겁게 웃는 얼굴로. 그리고 세상을 평화롭고 선한 곳으로 만드는 혁명을 그녀들이 축제처럼 해내기를 바랄 뿐이다. 딸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축복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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