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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은수저를 닦다 / 하성란

등록 2011-03-04 20:09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얼마 전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시상식장에서였다. 심사위원들의 심사평과 격려의 말이 이어졌다. 그 사람의 성품이 보이는 전혀 다른 심사평들이었지만 맺는말은 한결같았다. “정진하기를 바란다.” 아마 그즈음 전국에서 있었을 다른 신문사의 시상식 풍경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십육년 전 우리 때도 그랬다. 당선의 기쁨도 잠시, 종이를 씹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설 당선자의 이력은 특이했다. 경영학을 공부하다가 문학으로 급선회해 이십대 중반을 보냈다. 발랄하고 신선한 상상력이 인상적이라고 심사를 본 선배는 앞으로의 작품에 한껏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복병은 다른 데 있었다. 당선자는 어머니 몰래 숨어 소설을 써왔다고 고백했다. 소설을 쓰면 굶기 딱이라며 어머니가 방해 아닌 방해를 해온 모양이었다.

앞이 막막할 당선자에게 용기를 주어도 모자랄 시간에 당선자의 어머니를 회유하느라 힘을 들여야 했다. ‘소설 쓰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어머니 옆에 딱 붙어 앉아 있었지만, 어머니가 충혈된 눈과 피곤해 각질이 일어난 거친 얼굴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혹시나 어머니가 원고료는 얼마인가요? 책 한 권을 내면 수입은 얼마나 되나요? 등 조목조목 따져 물을까봐 조마조마했다. 활기차고 웃는 모습이 고운 어머니는 의외로 심지가 굳었다. 아마 딸 또래의 젊은 작가의 요절 소식이 그런 확신을 더 가지게 했을는지도 모른다. 하다 하다 안 되겠는지 나중에는 선배가 이런 말까지 하고 말았다. “문학하는 아가씨들 일등 신붓감입니다.”

결국 헤어지는 그 순간에도 어머니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문학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는 어머니의 말에 당선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여러 생각들로 착잡했다. 십육년 전 시상식 날이 떠오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외로웠던 기억도 떠올랐다. 십육년 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은 현실은 더 씁쓸했다. 십육년이 흘렀지만 매일 아침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고민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낫다. 밖에서 들은 이야기를 혹시나 소설 거리가 될까 전해주기도 하고 가끔은 “내 인생이 소설”이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글이 풀리지 않아 고개를 묻고 있을 때면 동생들에게 들으라는 듯 소리치기도 했다. “언니 힘드니까 좀 나눠 써줘라.”

얼마 전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올해 한국작가회의 사업의 일환인 사업명 ‘은수저’에 관한 소식이다.

시상식장에서 ‘정진하라’는 말을 들은 수십명의 당선자들이 일제히 올 한해를 시작했다. 반짝이는 작품으로 치고 나오지 않는다면 점점 작품 발표 기회는 멀어질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장기를 발휘할 기회란 많지 않다. 지면은 한정되어 있고 작가는 너무도 많다. 데뷔작을 끝으로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마는 이들도 많다. 올해 당선자 중에서 내년, 내후년까지 작품을 발표할 이들은 몇이나 될까.

‘은수저’ 사업은 녹이 슨 은수저를 닦아 반짝이는 은의 생기를 되찾아내듯 묻어두었던 작가들의 기량을 닦아 빛내자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재량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들을 발표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적지만 원고료도 받을 수 있고 귄위 있는 선배 평론가들로부터 총평도 들을 수 있다.

내 주위엔 오랜 무명을 떨쳐낸 이도 있고 아직 기회만 엿보고 있는 이도 있다. 친구는 자신이 지금 글을 쓸 수 있는 건 오랜 무명의 시간을 버텨온 힘이라고 종종 말했다. 그럴 때면 당나귀처럼 튼튼한 그의 이가 떠오르곤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동안 운이 좋은 작가였다는 걸 알고 있다. 박수와 환호란 오래가지 않는다. 그랬기에 이들의 출발에 누구보다 큰 박수를 보낸다. 그간 묻혀 있던 작가들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기쁨도 크다. 아쉽다면 이번 연도엔 여성 회원으로만 한정된 것이랄까.

생각난 김에 당선자에게 문자를 넣어봐야겠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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