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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죽은 시인의 사회 / 황현산

등록 2011-03-11 20:17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죽은 시인’이라는 말이 특별한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대비평의 아버지로 알려진 생트뵈브를 두고 그를 폄하하려던 사람들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이 19세기 중엽의 일이다. 그때 이 말은 한 문인이 이론에 경도하고 남을 헐뜯기에 바쁜 나머지 타고난 시인의 자질을 죽이고 말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생트뵈브는 비평가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었다.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 근대도시의 불행한 일상생활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려 했던 그의 시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현대시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입혔다.

피터 위어 감독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방향은 다르나 거의 같은 뜻으로 이 말이 쓰인다. 입시교육 내지 출세교육에 파묻힌 학교에서 자신들의 창조적 열정과 자질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모여 ‘죽은 시인 클럽’을 조직한다. 영화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닐 학생은 그가 바라는 연극배우가 될 수는 없어도 그 열정만은 간직하고 싶어 권총자살을 감행한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죽어가던 시인은 그렇게 실제로 죽은 시인이 된다. 그러나 비유적 죽음보다 실제적 죽음이 먼저 찾아온 경우에 비교한다면 닐 학생의 불행은 차라리 호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 시대에 문화 창조의 본거지에서 일하다가 가난과 병고에 시달려 세상을 떠난 경우는 독립영화 감독이었던 최고은씨가 처음은 아니다. 진이정 시인이 유명을 달리한 것은 1993년의 일이다. 그는 출판사에서 편집중이던 자신의 첫 시집이 출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폐결핵 말기 환자였던 시인은 변변하게 식사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문학에 대한 지식이 두터웠고, 말을 다루는 재간이 출중했던 이 사람이 생전에 편집자들이나 비평가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던 것은 그의 완벽주의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과 작품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학 전선의 제1선 기지에서는 그의 시를 숙독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의 유작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연작이나 <아트만의 나날들>, <엘 살롱 드 멕시코> 같은 뛰어난 시편들은 그렇게 2000년대에 젊은 시인들이 벌인 새로운 서정시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이 시와 담을 쌓고 사는 나라는 아니다. 사실은 시가 넘쳐난다. 시인이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많고, 시집이 그나마 많이 팔리는 나라가 이 나라라는 사실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대중가요에 시가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티브이 드라마의 ‘톡톡 튀는 대사’의 연원을 우리 시대의 시에서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으며, 광고도 시가 창출한 이미지에 기대고 시를 통해 새롭게 힘을 얻은 말들을 이용한다. 몇백만의 관객을 불러들이는 영화도 시와 소설이 개발한 감수성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실제로 최근에 크게 인기를 누리고 끝난 티브이 드라마에서 어쩌다 소개된 몇 권의 시집은 때아닌 호황을 누렸다. 공기처럼 누리던 시의 원산지가 어디였는지를 갑자기 깨달은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는 대량으로 소비되지만 그 원산지에서 일하는 시인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진이정의 경우처럼 특별히 독창성이 있는 작업, 그래서 미래의 생산성을 크게 기약할 수 있는 작업에 몰두하는 시인일수록 그 고단함이 더하다. 이 점은 시의 유통 경로가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사태를 파악해야 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년에 들어서는 문학단체에 지원하는 공적자금까지도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조건을 붙이고 있다. 하기야 저항의 문학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정부도 아닌 이 정부가 돈을 주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항이 없이는 한국 사회를 꿈에 부풀게 했던 한류 같은 것도 없다. 공짜 점심이 없다는 말은 이 경우에나 써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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