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사랑하는 윤아, / 박어진

등록 2011-03-18 20:20

박어진
박어진
박어진
새세상여성연합 대표
‘그 일’이 있고 난 지 한 달이 지났구나. 결혼 청첩장을 발송한 뒤 이틀 만에 결혼식 취소 전화 300통을 해야 했던 날들의 기억을 완전히 떨치기는 힘들겠지. 그래, 그건 서른을 코앞에 둔 네게 생애 최악의 참사, 심장골절 같았을 거야. 창피해서 밤에도 야구모자를 쓰지 않고는 동네 가게에조차 못 가겠다던 너. 지금쯤은 나이 많은 왕언니의 이야기가 네게 들릴까?

너를 더이상 위로하려는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알려주고 싶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네가 망가진 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아니, 너는 전혀 망가지지 않았어. 대학시절부터 사귄 그의 마음이 조금씩 떠나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도 결혼 결정을 내렸다고 했지. 오래된 사랑의 결론은 당연히 결혼이라고 믿었던 까닭에. 하지만 결국 결혼은 옳은 결정이 아니었어.

예단을 둘러싼 두 집안의 의견 차이가 끝내 당사자들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졌다는 소식은 마치 텔레비전 드라마 속 이야기 같기만 하더라.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상대는 파혼을 선언했고 홀로 남겨진 너는 배신감과 불명예를 감당하느라 끙끙대고 있었어. 근데 말이지, 파혼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어. 억지로 결혼을 강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용기 있는 결단 아니겠니? 또 그의 마음이 원래 네 것이 아니었다면 네가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거잖아.

이제 더는 그 일로 젊은 가슴속에 무덤을 만들지 마라. 대신 지금쯤은 네 생애 최초의 좌절 속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들여다보았으면 해. 모두가 부러워하는 엄친딸인 네게 이 사건이 굴욕이기만 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아. 고강도 의대 교육과정을 통과하느라, 끝없는 공부와 시험의 나날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네가 지금 멈춰 서서 한 박자 숨을 고르면서 네 삶과 주위 상황을 살펴보는 좋은 기회로 삼으면 어떨까? 일상의 중요한 환경인 동료들과 환자들을 대하는 네 마음 자세도 점검해 보면서 말이야. 아파보지 않고 어찌 아픈 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니?

안과 수련의인 네가 마음의 눈을 뜨고 환자를 바라보게 된다면 이건 직업적인 축복이기까지 해. 마음의 지옥을 통과해 나온 사람답게, 다른 사람들이 겪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이번 기회에 비약적으로 커질 수 있다면 이건 엄청난 소득이잖아.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은 진짜 의사 한 사람이 탄생하는 일대 사건일 수 있어.

모든 경험은 좋은 경험이라는 내 말에 아직 동의하기 어려울 걸 안다. 그렇더라도 상처에 새살이 돋게 하려면, 네 안에 있는 자기치유 능력을 전면 가동시켜야 하는 거잖아. 상처를 넘어, 그 어떤 상황에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능력을 증명해 보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는, 깊은 자존감을 지닌 네 모습을 보여줘. 지금의 상처와 혼돈마저 네 미래 자산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너는 충분히 강하고 아름다워.

이제 더는 그를 비난함으로써 너 자신이 위로받으려 하지 마라. 그를 미워하고 깎아내림으로써 그와 나눴던 사랑까지 모욕하지는 말라는 뜻이야. 그는 네 생애 최초로 설렘을 네게 선물한 사람이다. 비록 단명했지만 빛나던 사랑의 순간들이 왜 없었겠니?

실컷 그리고 당분간만 더 그를 미워해. 그다음엔 그를 용서하고 축복해주는 거야. 아무 이유 없이. 그가 언젠가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말이야. 한때나마 나눴던 사랑에 감사하고 그를 축복하게 될 때 비로소 너는 그에게서 풀려나게 될 테니까. 하루빨리 미움이라는 감옥에서 너 자신을 석방하길 바란다.


사랑하는 윤아,

삶이 어찌 한 번의 사랑만을 네게 주겠니? 기다려봐. 아픈 사랑 연습의 서막이 끝난 뒤 축제가 시작될 테니. 다시 사랑이 올 때 두려움 없이, 더 큰 설렘으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결국 봄날은 올 것이니까. 그 봄날을 만들어내는 건 바로 너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1.

한강은 보았다…계엄군의 머뭇거림을 [특파원 칼럼]

‘어준석열 유니버스’ 너머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2.

‘어준석열 유니버스’ 너머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햄버거집 계엄 모의, 조악한 포고령…국가 위협한 ‘평균 이하’ 3.

햄버거집 계엄 모의, 조악한 포고령…국가 위협한 ‘평균 이하’

[사설] 탄핵 찬성 의원에 ‘배신자’, 국민의힘은 어디로 가려 하나 4.

[사설] 탄핵 찬성 의원에 ‘배신자’, 국민의힘은 어디로 가려 하나

윤석열, 극우 거리의 정치 올라탈까…트럼프식 부활 꿈꾸나 5.

윤석열, 극우 거리의 정치 올라탈까…트럼프식 부활 꿈꾸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