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동요 <고향의 봄>의 첫 소절은 ‘나의 살던 고향’이다. 쓰기는 그렇게 쓰고 노래로는 ‘나에 살던 고향’이라고 부른다. 민족어의 순수성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나의 살던’을 ‘내가 살던’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두 말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나의 살던’ 또는 ‘나에 살던 고향’은 ‘내 경우 고향에 대해 말한다면’으로 들려 ‘내가 살던 고향’보다 더 겸손한 맛이 있다.
올해는 이원수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이 초등학생이던 열네 살에 노랫말을 쓴 <고향의 봄>은 한때 국민 애창곡의 하나이기도 하였지만 선생의 친일 전력이 알려지면서 그 빛을 많이 잃었다. 우리에게는 국민 모두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으나 그 작사자나 작곡자의 정치적 이력 때문에 이와 비슷한 운명을 가진 노래들이 많다. 노래를 떠나서 문학 일반으로 넘어가면 그 사정이 더욱 심각하다.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가려낸 42인의 친일 작가 외에도 친일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작가가 적지 않다. 우리말로 된 문화유산이 특별히 많다고 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들의 작품을 떳떳하게 누릴 수 없는 사정은 안타깝다. 친일 작가 명단을 작성한 단체들이 그 작품 목록을 공개할 때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을 말하며 “모국어를 위한 참회”의 형식을 취했던 것도 바로 이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도 진실을 덮어 가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문학이 인간 의식의 맨 밑바닥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작업임을 염두에 둔다면, 진실 가리기는 문학을 욕되게 하는 일이 되고, 그 작가들을 영원히 허위 속에 가둬 놓는 일이 된다. 어떤 비평가는 작가의 윤리와 작품의 윤리를 구별해야 한다며,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는 윤리적으로 순결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가 훌륭한 작품을 썼기에 훌륭한 작가로 인정된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이 예는 적절치 않다. 발자크는 자기 안에서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자기 시대 비판의 창조적 열망으로 바꿀 수 있었기에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였다. 반면에 친일 작가들의 친일 행위는 그들이 애초에 지녔던 창조적 열망까지도 메마르게 만들었다.
친일 작가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으며, 전쟁에 광분하는 일제의 억압에 쫓겨 작가들 간에 품앗이를 하듯 친일 작품을 몇 편씩 쓴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은 아마도 사실과 부합할 것이다. 일례로 이화여전 교수였던 김상용 시인은 시대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꽃집을 차렸으나 일제의 등쌀을 끝내 못 이겨 친일 수필 몇 편을 써야 했다. 이런 사정은 작가들의 친일 행위가 개인의 윤리적 과오이기도 하지만 민족수난사의 일부였다고 생각하게도 된다. 우리 시대의 작가들이 아버지 세대의 친일 행위를 자신들의 일로 참회하는 것도 실상은 나약한 개인들이 떠맡게 된 짐을 역사의 짐으로 여겨 함께 나눠 지자는 데 목적이 있다. 그 일은 물론 쉽지 않다.
그게 2001년이던가, 우리가 미국을 거들어 베트남전쟁에 끼어들었던 일을 사과하기 위해 한국작가회의가 베트남 작가들을 찾아갔을 때, 나도 그 방문단의 한 사람이었다. 베트남 작가들은 우리의 방문을 고마워하면서도 크게 감동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들이 승리한 전쟁인데 새삼스럽게 사과는 무슨 사과냐고 묻는 듯한 기색이었다. 우리에게도 이 승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친일의 상처에서 해방되려면 우리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이끌어야 한다.
분단된 민족이 우애를 되찾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더욱 높게 받들어져, 사회의 민주적 토대가 굳건해지면, 어떤 나쁜 기억도 우리를 뒤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세대 작가들의 의미있는 작품들을 우리가 떳떳하게 누리는 일은 그들을 미화하고 그 과오를 숨기는 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벌써 튼튼하다면 과거의 상처가 우리를 어찌 얽매겠는가. 숙제는 우리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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