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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나는 진화한다 / 박어진

등록 2011-05-06 19:34

박어진 칼럼니스트
박어진 칼럼니스트
마침내 ‘나 홀로 집에’ 시대가 열렸다. 아들이 입대한 뒤 딸은 남의 집 지어주는 활동가가 되어 멀리 떠났다. 남편은 다른 도시에 사는지라 주중 싱글의 신분이 저절로 굴러들어온 거다. 우선 나는 아침에 제멋대로 일어난다. 30년 넘게 월급쟁이로 살았으니, 충분히 게으를 권리가 있다. 휴대전화의 알람 설정은 이제 필요 없다. 신문을 훑으며 발포성 비타민 C를 녹인 물 한잔을 마시고 프라이팬에 빵을 조금 구워 먹는다.

외출을 안 하는 날 점심은 꼭 밥이다. 나물 두 가지를 기본으로 반찬을 제대로 차려 먹으려 노력한다. 중년 독신은 잘 먹어야 때깔이 나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간장으로 무친 콩나물에다 얼갈이배추를 데쳐 된장에 무친 나물을 올린다. 구운 간고등어 한 토막에 두부부침, 거기다 고춧가루 넣고 빨갛게 버무린 부추겉절이에 곁들인 도토리묵도 단골 출연진이다. 해질 무렵 양재천 풍경 속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니, 산책은 자연히 늦은 오후 시간대로 잡는다. 그 외의 시간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게으르게 보낸다. 케이블 티브이 리모컨을 돌려가며 낡은 연속극 재탕 삼탕을 보고, 총 들고 다니는 황야의 건달 영화도 들여다본다. 지치지도 않는지 모두들 복수에 목숨 거는 스토리는 대개 지루하다.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밥 먹고 수다 떨 때 시간 제한이 없다는 게 신기하다. 30년 넘게 점심시간 제한에 매여 온 후유증이랄까. 속으로 웃는다.

어둡고 비 많이 온 토요일 오후, 구리시에 차를 몰고 갔던 남편이 무사히 돌아온다. 비 오는 날은 당연히 부침개가 어울린다. 미나리, 감자부침에 애호박 썰어 넣은 부추전까지 3종 세트를 차린다. 솔잎 향기 그윽한 술 한 병을 딴다. 마주앉아 권커니 잣거니. 아이들을 매개로 하지 않고 남편과 다시 일대일 대화 채널을 복원해야 할 나이다. 별 보는 게 취미인 남편은 인터넷 동호회 ‘별하늘지기’ 장터에 올라온 중고 적도의를 사러 갔었다는 거다. 물건이 맘에 드는지 싱글벙글이다. 그가 최근 보현산천문대에 스타파티를 하러 갔다 만난 어느 재야 고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문분야 책 저술가인데 웬만한 천문학 교수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실력에다 우주에 대한 스토리텔링 능력까지 갖췄다고 입에 침이 마른다. 은둔 고수들의 내공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안목, 남편의 겸손함이 맘에 든다.

근데 한때 과묵하던 이 사람, 몇 년 새 말이 많아졌다. 이번엔 자기 자랑이다. 별 보는 데 쓰는 분광기를 구입해서 스스로 손질해 기능을 업그레이드시켰다나. 거기다 십여년 전 왼쪽 눈 백내장 수술로 깎인 각막의 각도 덕분에 망원경으로 별을 볼 때 근자외선·근적외선까지 가시영역이 확대되었다는 이론을 설파하기까지 한다. 이건 또 뭔 소리? 잘은 모르지만, 하여튼 가시광선의 영역이 확대된 건 백내장 수술의 보너스인 모양이다.

월요일 아침, 남편이 떠난다. 이 또한 반갑고 기쁜 일. 시도 때도 없이 혼자서 책 읽고 놀 수 있으니 이 자유가 어찌 즐겁지 않으랴? 집중은 썩 잘되지 않으니 여러 권을 한꺼번에 놓고 읽는 스타일이다. 경쟁력을 갖출 필요도, 자격증을 따야 하는 것도 아니니 그야말로 내 독서, 내 맘대로다. 읽다 말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아, 내게 진짜 중요한 일이 하나 남아 있다. 그건 내 눈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는 일. 핵심 일과다. 노년의 어느 날, 설령 혼자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때가 오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뭔가를 축복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 모든 존재들이 나보다 더 먼저 더 밝고 아름답게 빛나기를 기원할 수 있다. 가장 큰 기쁨이기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세상과 모든 존재들을 축복하는 일이다. 가족과 나라와 동서양, 그리고 이 행성의 모든 경계를 넘어 내가 누리는 고요한 평화를 나누고 싶어서다. 함박웃음을 날리면서!

박어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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