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소설가
올해 또한 연휴로 약간 들뜬 정황 속에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타성처럼 보냈다. 겉으로 가족 제일주의가 기승스럽고 안으로 가족 해체가 심화되는 마당에 인위적 기념일이 뭐 그리 대단할까마는, 내일은 스승의 날이요, 모레는 또 성년의 날이다.
이름 없이 빤한 날이 드물 정도로 유별난 달이 이달인데, 개중에 퍽 멋쩍은 것이 부부의 날(21일)이다. 화목한 가정을 일구기 위해 5월에 둘(2)이 하나(1) 되자는 뜻으로 국회에서 2007년에 제정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사자성어의 한글판 버전인가. 싱겁기는 고드름 장아찌라더니 구색 맞추기 발상이 영 어정뜨다.
다 늦게 가정의 달을 수식하는 날들을 타박하려는 게 아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고 마음을 미래에 두라’는 푸시킨의 시구도 있듯이, 식구끼리 서로 챙기고 섬겨 고단한 오늘을 위무하는 시간이 어찌 공허하기만 할까.
그래서도 이맘때만 되면 이미 사라진 어머니날이 아쉽고 섭섭하다. 어버이날로 한데 뭉뚱그리기에는 이 땅의 어머니상이 아주 특별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맛이라든가, 어머니는 즉 고향이라는 따위 닳고 닳은 헌사는 스스로 무람하여 입에 담기 싫다.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번인 까닭인데, 원조를 다투는 국밥·돼지족발·낙지볶음·냉면집의 점두를 지키는 ‘할매’ 솜씨의 상업화야 어떻든, 어머니가 있으면 궁핍도 두렵지 않았다. 그뿐인가. 4·19, 5·18, 현충일 묘역에서 손으로 묘비를 쓸며 눈물짓는 사람은 으레 소복 차림의 노모였다.
서울에 몸을 부리는 것 자체가 어려운 세월에, 자식은 자식대로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기 마련이었다. 85년 봄, 민주화운동을 하다 투옥된 서울대생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에도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 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소년이 어디 한둘이던가. 운동권으로 커 미구에 감옥으로 떨어지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그 뒤를 따르기 쉬웠다. 고통을 속으로만 삭이고 뒷전을 돌던 분들이 온몸으로 수발을 들되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의 혁명의식과는 물론 다른 세계였다. 원초적 직정(直情)이 그만큼 소박하고 강했다.
가령 보자. 간첩죄로 몰려 19년, 17년씩 옥살이를 한 재일교포 서승·서준식 형제의 어머니(오기순·吳己順)는 10년 동안 50차례나 일본에서 한국 교도소 면회를 다닌 끝에 그들의 석방조차 못 보고 병사했다. 일어판 추도문집 <아침을 보지 못한 채>(81년 10월)에 나오는 사연이 일일이 절절하다.
‘민가협’에서 엮은 <오 어머니 당신의 눈물은>(87년 8월) 또한 참담한 수난의 기록으로 빼곡하다. 뒷감당은 으레 어머니들의 몫이었다.
때 지난 어머니날 이야기가 두서없는 가운데 무척 오래된 어느 해 5월의 시골버스 생각이 다시 기억에 새롭다.
버스는 물론 만원이었거늘 통로에 서 있던 중년 여인이 갑자기 “내 꽃 내 꽃” 외쳤다. 이리저리 밀리던 나머지 가슴에 단 붉은 종이 카네이션을 그만 잃어버린 것이다. 다른 아낙이 “여깄소” 찾아주어 다행이었으나 “종이꽃도 꽃인가” 하고 안 해도 될 말을 보탠 게 탈이었다. “뭐시여. 자기는 그나마 차지하지 못했으면서…” 톡 쏘는 말발에 자랑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입씨름을 하는 사이에 ‘카네이션’이라는 꽃이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나야말로 공연한 군소리를 보태어 푼수를 떤 셈인가.
최일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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