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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나만 가수다 / 하성란

등록 2011-05-27 22:34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소년잡지에서 읽은 동시를 흉내내 동시를 써낸 일이 계기가 되어 육학년 졸업할 때까지 각종 글짓기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여러 명이 단체로 출전하는 대회는 그나마 부담감이 덜했지만 학교 대표로 달랑 혼자, 담당 선생님과 참가해야 했던 지구별 대회 등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의 대회는 평일, 수업 시간 중에 열렸다. 아이들 하나 없는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일부터가 고역이었다. 몇몇 아이들은 혼자 수업에 빠진다고 부러워했지만 선생님 뒤를 따라 넓은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는 무언가에 압도당한 듯 걸음을 떼기도 힘에 부쳤다. 광장은 물론이고 조금 넓다 싶은 행사장에 들어서면 주눅이 드는 것은 그때부터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별 대회는 인근 학교 학생들의 대항이었다. 매회 학교를 바꿔가며 대회가 열렸다. 열명 안팎의 처음 보는 학생들이 주뼛주뼛 한 교실에 앉아 그때그때 주어지는 소재로 시나 산문을 썼다. 지구별 대회에서 한명을 선발하고 다시 일정 구역 안의 지구에서 선발된 아이들이 경합을 벌이는 식으로 최종엔 대한민국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단 한명을 가려낸다고 했다. 대한민국에는 그런 ‘지구’가 수도 없이 많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자면 대한민국이 무척이나 넓게 생각되었다.

우리는 ‘선수’라고 불렸다. 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선발되었으니 ‘선수’란 말이 그른 표현은 아니었지만 승부 근성을 부추기는 듯한 말의 어감에 또 한번 짓눌렸다. 좋은 글을 쓰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아무튼 육학년에 올라갔을 즈음에는 선생님들이 어떤 소재를 낼지 어림짐작할 수 있는 진짜 선수들이 되어 있었다.

매번 다른 학생을 내보내는 학교도 있었지만 우리 학교처럼 줄곧 한 학생으로 밀어붙이는 학교도 있어 나중에는 대회 때만 만나는 ‘대회 친구’가 생겼다. 그 친구 이름은 영이였다. 우리는 둘 다 매번 뒤에서 세는 것이 더 빠른 성적을 내곤 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라는 소재에서 영이가 2등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영이가 수줍게 말했다. 그냥 우리 엄마 이야기를 썼을 뿐이라고. 그 말을 할 때 영이는 언니처럼 보였다.

일등은커녕 단 한번도 상위권에 든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지구에서 뽑힌 아이들의 실력은 알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쓴 글을 읽어볼 수도 없었다. 글을 써내고 여러 학교에서 모인 선생님들이 심사를 하는 동안 아이들은 운동장에 나와 있었다. 놀라고는 했지만 심사 결과를 기다리느라 응달에 앉아 운동장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했다. 왜 소년잡지의 동시를 흉내낸 걸까, 수없이 후회도 했지만 행차 뒤 나팔이었다.

그랬기에 오랜만에 들른 친정에서 동생이 대뜸 “나가수 봤어?”라는 말을 꺼냈을 땐 아차 싶었다. 친정집 텔레비전은 이미 지나간 방송도 볼 수 있어, 못 봤다는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 동생이 지나간 방송을 틀었다. 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가수들을 보고 있자니, 아마 삼십여년 전, 낯선 학교의 운동장에 앉아 있던 내 모습도 저랬으려니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프로그램의 재미상 제작진의 주문이 있었겠지만 가수들은 초조해 보였다. 아니 드러내놓고 초조해하지도 못한다. 저러다 ‘나만 가수다’가 되는 거 아냐? 걱정도 든다.

“요즘 저 프로 안 보면 후배들과 말을 섞을 수도 없어”라는 동생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 프로그램의 인기는 몸으로 알고 있다. 식당에서 택시에서 모두 다 그 이야기들이다. 서바이벌 형식의 프로그램이고 두번 대항의 순위를 평균 내 가장 성적이 좋지 않은 가수를 탈락시킨다. 그 자리에는 다른 가수가 새로 영입되는데 가수 선정을 두고도 뒷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부엌에선 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아이가 소리지르며 뛰어다니는 통에 노래에는 영 집중할 수가 없는데, 불현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그날들이 떠오른다. 해는 정수리에서 이글거렸고 운동장엔 그림자 하나 없었다. 대회고 뭐고 일등이고 뭐고 그냥 그 자리에서 뿅, 사라지고만 싶었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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