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김 감독은 자신이 받아야 할 빚을
우리가 치러야 할 저 큰 빚에 연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저 큰 빚에 연결할 수 있었다
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1996년의 <악어>부터 2008년의 <비몽>까지 거의 모두 보았지만, 고백하건대 영화관을 찾아가 관람권을 사서 본 경우는 한 번도 없다. 두세 편의 영화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인터넷의 이런저런 사이트에서 불법인지 합법인지 따져보지 않은 채 파일을 내려받아서 보았다. 내가 그 영화들의 흥행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늘 생각만 앞서고 실행이 따르지 못하는 성격 탓이 크지만, 그럴싸한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 감독의 영화를 보려면 특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내가 준비를 끝낼 때까지 영화관이 기다려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나는 김 감독의 마니아가 아니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보고 길지 않은 메모라도 남겨놓은 경우는 <수취인불명>과 <빈집>을 보았을 때뿐이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내가 김 감독의 영화를 뒤늦게라도 빠짐없이 보려고 애썼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변변치 못한 학력으로 제일급의 영화감독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존경해야 할 사람이었으며, 이런 경우에 늘 빠지기 쉬운 함정을 그가 거의 모두 뛰어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이 제 자신의 야만성을 다 끄집어내어 우리가 눈감은 채 떠받들고 있는 이 삶의 밑바닥을 휘저어 고발하려 하는데, 그 처절한 분투를 모른체하며 최소한의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범죄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나와 같은 한국 사람이 잔인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알아보자는 속셈과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잔인함이 아니라 그것을 생각해내고 설득력 있는 영상으로 옮겨놓을 수 있는 상상력의 튼튼함일 것이다. 잔인성이건 다른 것이건 간에, 우리 안에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어떤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을 끌어내어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주체의 역량이기도 하다. 김기덕 감독은 튼튼한 상상력을 지녔으며, 그 괴물을 외면하려는 비겁한 마음들과의 싸움에서도 우리 시대에 가장 높은 투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리의 문화적 상상력이 그에게 진 빚이 적지 않다. 그가 찍은 15편의 영화가 그때마다 화재를 불러 모으면서도 흥행에서는 모두 실패했기에 그는 희생자인 것이 분명하다.
최근에 김기덕 감독이 스스로 연출하고 연기자가 되어 찍은 영화 <아리랑>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김 감독이 이 영화에서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아 자신에게 질문하는 사람으로, 그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으로 여러 역할을 도맡고 있다고 한다. 그에게 이 영화는 복수였으며, 자기치료의 과정이었다고도 한다. 영화의 끝에서 목 놓아 우리 민요 <아리랑>을 불렀다고도 한다. 복수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빚지고도 갚지 않는 사람들, 빚을 진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빚을 상기시키는 일이겠지만, 자기치료란 무엇일까.
그가 아리랑으로 희생자의 한을 표현하려 하였다면 그 한은 김 감독 개인의 한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많은 빚을 졌다. 나라를 되찾아 민주화의 터전을 만들고, 주눅 든 정신을 들어올리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도 잊혀버린 사람들이 많다. 김 감독은 자신이 받아야 할 빚을 우리가 치러야 할 저 큰 빚에 연결할 수 있었기에, 그 기이한 영화가 자기치료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