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구 동국대 불교대학원 생사의례학과 교수
[낮은 목소리]
자살이 망국병처럼 번지고 있다. 연간 1만5천명 이상이 자살로 죽으며, 매년 늘어난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삶을 포기할 정도로 한국 사회가 그렇게 각박하고 모진 사회인가? 그렇다면 지금보다 몇곱절 어려웠던 시절엔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단 말인가? 삶은 본디 고해(苦海)라 했다. 살며 여러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극복해 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단지 삶이 어렵다고 죽는 건 아닐 게다. 분명 어딘가에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이어주는 솔기들에 심각한 균열과 파열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 사회를 자살대국으로 만드는 근본원인은 바로 생명윤리의 부재이다. 생명은 그 자체가 범접할 수 없는 목적적·절대적 가치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생명이 삶의 방편·수단이 되고 있다. 살다가 지칠 때,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에 가로막힐 때 죽거나 또는 남을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식이다. 어디에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지 않는다. 일차적 책임이 있는 교육제도는 입시교육, 졸업하면 돈 버는 처세교육뿐이다. 인성교육의 상당 부분을 맡는 가정교육 역시 출세 지향이다. 아이들이 몰입하는 게임은 생명이 도구이자 방편, 때론 즐길거리라고 각인시킨다.
본디 삶·생명의 신성성을 전하던 종교도 현세의 구복과 처세만 강조하고 생명을 포기한 지 오래다. 종교 자체도 삶의 수단이 됐다. 살며 어쩔 수 없이 짓는 죄에 용서를 빌러, 사후 구원을 위해 종교를 갖는 사람은 드물다. 좋은 대학 가게 해 달라고, 사업 잘되게 해 달라고 빌러 간다.
언론 역시 생명·죽음을 종종 흥미거리로 취급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유명인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관심사다. 자살자를 미화하거나 죽음을 잠시 동안의 ‘여행’으로 묘사하는 허언법(euphemism)은 생명의 본질을 왜곡시킬 뿐 아니라 종종 죽음이 삶의 방편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유포한다.
우리 사회에 건강한 삶의 윤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선 체계적인 제도적 접근이 필요하다. 생명윤리와 ‘죽음교육’의 제도화를 위해 시급히 ‘생명(죽음)교육지원법’이 제정돼야 한다. ‘통일교육지원법’이나 ‘환경교육지원법’이 해당 교육을 제도화한 것처럼, 생명의 소중함과 신성함에 대한 교육을 제도적으로 강제할 필요가 있다. ‘죽음교육가’를 양성하고, 초중고교 커리큘럼에 생명교육을 필수과목으로 배정해야 한다. 미국이나 서구의 경우 초중고는 물론 대학에서도 생명·죽음 관련 과목이 주요한 커리큘럼으로 편성돼 있다. 유치원생들이 인근 묘지로 피크닉을 가는 것이 다반사이고 대학 교양과정엔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와 같은 과목들이 지천이다.
매년 수백만명의 국민들이 사랑하는 가족의 자살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환자가 된다. 연간 자살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3조원이 넘는다는 연구도 있다. 자살은 가족적 비극을 넘어 삶을 무의미화시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해치는 근본원인이 된다. 거듭, 우리 사회의 뜯겨진 솔기들을 다시 굳건히 봉합하기 위해선 죽음·생명교육 제도화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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