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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낮은목소리] 여자2호 “‘희망고문’ 때문에 성희롱도 참았다”

등록 2012-05-03 19:47수정 2012-05-04 16:38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인턴사원의 속사정

1980년대 들어 대졸자가 과잉생산되자 기업은 ‘인턴사원’이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1984년 럭키금성(현 엘지그룹)이 한국 최초로 인턴사원을 모집했다. 당시에는 밀려드는 대졸자들 가운데 우수 인재를 고른다는 의미가 컸다. 하지만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뒤 인턴사원제는 ‘실업구제’라는 일종의 복지정책으로 변질됐다. 인턴사원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뽑혔고, 그만큼 소모적으로 사용된 뒤 ‘버려졌다.’ 2000년대 들어 거의 모든 기업이 인턴사원제를 운영하면서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기업이미지 홍보라는 ‘구실’이 하나 추가됐고, 대학생들은 ‘이력서 한 줄’을 위해 줄을 섰다. 인턴사원은 기업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했다. 정규직 전환율은 더욱 떨어졌다. 일례로 대표적인 정부 지분 금융기관인 우리은행의 경우 인턴사원의 정규직 전환비율은 2009년 25%에서 2010년 20%, 2011년 12.6%로 급감했다.

총체적인 관리도 부실하다. 고용노동부에서는 ‘중소기업 청년인턴제’만 관리한다. 기타 공공부문 인턴은 기획재정부 소관이다. 여기에 민간부문의 인턴 실태는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한 직원은 “집계 기관이 흩어져 있어서 일괄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2008년 발표된 이종구·김병기 교수의 ‘한국 기업의 인턴사원제도의 사적 전개과정과 시대별 특성 비교분석에 관한 탐색적 연구’(경영사학 제23집) 논문엔 전국 6개 지역 대학생 300명의 여론조사 결과가 실려 있다. 이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46%가 ‘인턴제도가 우열대학을 조성하고 있다’고 대답했고, ‘신분 대우 정도’의 경우 보통 58%, 아니다 29%, 매우 아니다 3%로, 총 90%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번 ‘낮은 목소리’는 최근 인턴사원 경험이 있는 취업희망자 3인의 대담으로 꾸몄다. ‘인턴1·2·3호’라는 익명으로 대담을 진행했다. 인턴1·3호는 남성, 2호는 여성이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인턴1호 자기소개들부터 하자. 스펙까지 자세하게. (웃음) 난 지방 국립대 경영학과 04학번. 토익 890점에 학점은 3.7이야. 자격증은 컴퓨터활용능력(컴활) 2급, 한자능력검정시험 2급이고. 외부 입상 경력은 한 개 있어. 호주로 어학연수 6개월 다녀왔고.

인턴2호 대단하네. 난 서울 소재 사립대 인문계열 06학번. 학점은 4.0으로 좀 높은데, 토익은 730점. 다른 자격증 같은 건 없어. 연수 경험도 없고.

인턴3호 난 서울 소재 사립대 사회과학부 03학번. 학점은 3.5, 토익은 800점. 교내 학술상 한번 타봤고, 대기업에서 하는 청년 홍보 대사 한번 해봤어. 자격증은 컴활 2급 한 개.

인턴1호 다들 인턴은 언제 해본 거야? 난 작년쯤에 한 이동통신사 인턴으로 5개월.

인턴2호 5개월? 와, 길다. 난 작년에 은행 2개월.

인턴3호 난 한 공사의 지역 사무소에서 5개월 일했어.

일부만 정규직 전환 ‘미끼’
전환기준 불투명
“지방대 출신이라…” 자책에
인턴들끼리 의심도

인턴1호 요즘엔 인턴 경력 없으면 아예 정규직 지원하기가 힘든 거 같아.

인턴2호 맞아, 입사 원서에서 ‘경력란’이 꼭 있잖아. 사실 대학 졸업한 학생들이 무슨 경력이 있겠어. 인턴이라도 해봤으니 요새 입사 지원하면 그나마 한 줄 채워서 다행이야.

인턴3호 정말 인턴하면서 하나도 남는 건 없고, 이력서에 한 줄 남더라.

인턴1호 너희는 인턴하면서 어땠어? 난 그때 생각하면 좀 억울해. 50%나 정규직으로 전환해준다고 했는데 난 탈락했거든.

인턴2호 우와 50%? 그렇게 정규직 많이 해주는 데가 있어? 장난 아니다. 내가 다녔던 은행에는 인턴 우수 수료자 상위 10%에게 공채 때 가산점을 주는 정도였어.

인턴3호 너희는 그나마 희망이 있었네. 내가 다닌 곳은 아예 그런 것도 없었어. 지원할 때부터 ‘정규직 전환에 어떠한 가산점도 없음’이라고 명시를 하더라고. 좀 야박하더라.

인턴1호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억울해. 인턴 100명 가운데 50명 안에 못 들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 정말 열심히 한 거 같은데. ‘지방대를 나와서 그런 건가’라는 피해의식이 생기더라고.

인턴2호 나도 그래, 회사에서 말하는 ‘우수 인턴’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 나중에 상위 10% 안에 든 친구들 보니깐 다른 친구들보다 잘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하지만 우리는 그 10% 안에 들려고 치열하게 노력했고.

실무는 가르치지도 않고
복사·문서폐기 허드렛일만
회식 참석 강요에
은근한 성희롱까지…

인턴3호 일종의 ‘희망고문’이구나.

인턴1호 딱이다, 딱. 완전 ‘희망고문’이지. 보통 인턴들에게 숙제 개념으로 여러 보고서를 내게 하잖아. 그 숙제를 평가한다는 것도 이상해. 같은 학생끼리 얼마나 뛰어난 보고서를 낼 수 있겠으며, 또 그 차이가 얼마나 나겠어.

인턴2호 우리도 상품개발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내용 다 거기서 거기야. 그리고 나중에 보니 정말 잘했던 친구들이 상위 10% 안에 든 것도 아니더라고.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판단한다는데 여전히 의문이야. ‘누구는 회사 중역 자식이더라’ 소문도 돌아서 같은 인턴들끼리 의심하기도 해. 물론 그 안에 못 든 사람들의 자책감일 수도 있지만.

인턴1호 정규진 전환이란 희망고문 때문에, 우리 엄청나게 눈치 보잖아. 들어갈 때는 엄청난 인재를 선발하는 것처럼 해놓고, 막상 입사하면 허드렛일만 시키잖아. 거기다가 야근에 회식 참석 강요까지. 그렇다고 진짜 일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인턴2호 나도 그랬어. 은행업무라는 특성도 있지만, 거의 실무 경험을 못 해봤던 거 같아. 창구 입구에서 인사하고 손님들 안내하기, 커피 타 오기, 복사하기, 문서 폐기하기 등, 다 잡일이었던 거 같아. 나도 회식 많이 끌려다녔어. 2개월 인턴 하면서 8번?

인턴3호 8번? 우와 한 주에 한 번씩이네.

인턴2호 미치는 줄 알았지. 그냥 밥만 먹고 가는 게 아니잖아. 2차 가고 3차 가고. 가자는 대로 다 끌려다녔지 뭐. 거기서 발 빼면 왠지 찍힐 거 같은 느낌이랄까. 한번은 인턴사원들끼리 지방으로 단기 연수를 갔는데 거기서 돌아오는 날 회식 오라고 연락이 왔어. 피곤해 죽겠는데 어쩌겠어, 참석했지. 한다는 말이 ‘인턴2호씨가 워낙 인기가 많아’ 이러더라고.

인턴1호 정말 심했구나. 나도 회식은 많이 참석했는데 그 정돈 아니었던 거 같아. 차라리 난 ‘무관심’이란 고통이 더 컸어.

인턴3호 그건 인턴들이 다 겪는 고통인가봐. ‘무관심’ 정말 심한 거 같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느낌. 난 아예 담당 직원이 알아서 출근하고 알아서 가라고 했어. 하루 종일 일이 없어서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본 적도 있고.

인턴2호 나 같은 경우는 직원들이 퇴근하라는 소리를 안 해서 밤 10시까지 남아 있던 적도 있어. 나중에 하도 힘들어서 ‘저 가도 되나요’ 했더니 담당 직원이 ‘아직도 안 가고 뭐 했어?’라고 오히려 뭐라 하는 거야. 기가 막혀서. 그래 놓고 다음날에도 또 가라는 소리가 없는 거야. 사람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두 달 동안 평균 8시 넘어서 퇴근했던 거 같아.

인턴1호 인턴에겐 야근을 못 시키게 돼 있잖아. 그런데 다들 자발적으로 하는 거 같아. 숙제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실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욕구도 있는 거 같고. 쉽게 말해 잘 보이고 싶은 거지.

인턴2호 모든 문제는 그 ‘희망고문’ 때문이야. 모든 걸 그거 하나 때문에 참는 거라고. 나 같은 경우는 성희롱까지 당했어.

인턴3호 헐! 어떤?

인턴2호 회식 2차로 술 먹고 노래 부르는 주점을 갔는데, 남자 직원들이 내 앞에서 노골적으로 음담패설을 하는 거야. 거기다가 심지어 한 팀장은 노래 부르면서 나한테 강제로 어깨동무하고 손까지 잡았어.

인턴1호 이런 미친! 가만있었어?

인턴2호 어떻게 해. 거기서 빼면 분위기 어색해지잖아.

인턴3호 정말 심했다.

인턴2호 그렇게 참았는데, 나중에 집으로 상위 10% 안에 못 들어서 유감이라는 위로 편지 한 장 오더라. 씁쓸했어.

눈치보여 퇴근 못하고
급여도 일반 알바보다 짜
기간 채워야 수료 경력인정
정규직 지원 기회도 놓쳐

인턴3호 나 같은 경우엔 ‘돈’ 문제가 눈에 들어오더라. 일단 하루 8시간 주 5일 일하는 건 정규직과 다름없잖아. 그런데 오히려 거기서 일하는 대학생 ‘알바’보다 급여가 적었어.

인턴1호 사실 급여 문제는 ‘감히’ 꺼내지 못하잖아. 그런데 자발적 야근에다가 하루 꼬박꼬박 정규직과 거의 같은 시간을 일하는데 100만원 주는 건 옳지 않다고 봐.

인턴2호 인턴들 대부분 100만원 근처 받는 거 같은데, 정규직만큼은 아니지만, 일반 계약직 사원만큼의 급여는 줘야 한다고 생각해.

앞서 언급한 논문을 보면 응답자의 59%가 신입사원의 2분의 1의 해당하는 급여가 인턴사원의 적정임금이라고 답했다. 현재 매출액 순위 500대 기업의 대졸 신입사원 평균연봉은 3473만원이다.

인턴3호 청년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늘려온 인턴인데 오히려 기회를 뺏는 경우도 있어. 그거 다니면서 중간에 다른 정규직 공채가 떠도 넣을 수가 없겠더라고. 일단 중간에 나가면 인턴 수료가 아니니깐 경력 인정도 못 받고, 그리고 괜히 이미지만 안 좋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인턴1호 맞아. 지금 생각하면 그 5개월 동안 공채 공고가 나왔던 다른 곳에 지원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많이 해.

인턴2호 종합해보면 인턴이란 ‘정규직 희망고문을 받고 있는 존재감 없는 존재’네.

인턴3호 뭐가 그리 어려워. ‘알아서 기는 존재’가 딱 맞지.

인턴1호 난, 이렇게 우리들이 모여서 일종의 ‘회사 험담’을 하는 게 한편으론 불안해. 나중에 취업에 불이익이 생길까봐 말이야.

일동 기자님, 저희 노출되지 않게 신경 써주세요!

(이 당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대담이 끝난 뒤 인턴1·2·3호는 차례대로 기자에게 ‘신분 노출 안 되게 해달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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