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 칼럼니스트
떠나야 하실 때를 아신 걸까?
꿈의 언어를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엄마는 작별 선언을 하신 것이다
꿈의 언어를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엄마는 작별 선언을 하신 것이다
토요일엔 별일이 없는 한 친정엄마를 뵈러 간다. 얼마 전 그날도 엄마는 점심을 차려놓고 둘째 딸인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여느 때처럼 돼지고기 볶음에 계란찜과 조기구이로 밥상이 푸짐했다. 멀리 있는 남동생 내외의 안부를 묻고 나니 엄마가 말하셨다. “며칠 전 꿈에서 내가 너희 5남매에게 유언을 했다. 모두 다 내 옆에 모였길래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고 말했지. 그동안 신세 많이 졌다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 입에 밥이 가득한 채로 나는 얼른 말했다. “엄마, 그건 개꿈이에요.” 엄마는 방긋 웃으시며 태연하게 밥을 드셨다. “꿈속에서 너희들과 인사하면서 내 마음이 편안하더라. 지금도 편안하고.” 엄마 말씀에 “어, 그러고 보니 좋은 꿈이네요. 엄마 마음이 편안하셨다니 좋아요.” 나는 뒤늦게 맞장구를 쳤다.
엄마는 토끼띠, 우리 나이로 여든다섯이다. 일본 식민시대 전라도 땅에서 태어났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광주의 좋은 여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게 두고두고 원통했던 일이라고 하셨다.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짧게 한 후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아 길렀다.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가난, 남편과의 불화에 가정폭력까지 삶과 결혼의 쓴맛을 골고루 맛보았다. 겉보기에 평범한 할머니지만 어딘지 비범한 여성이다. 사실 84년이 넘게 대한민국 국민 여성으로 살아왔다는 사실 자체도 이미 충분히 비범하지 않은가. 그런 엄마가 떠나야 하실 때를 아신 걸까? 꿈의 언어를 내가 알지는 못하지만 엄마는 작별 선언을 하신 것이다. 꿈 이야기를 하신 건 우리 5남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꿈과 현실 사이의 시차를 인정하더라도 말이다.
갑자기 급 반성 모드로 바뀌며 나를 돌아본다. 때로는 의무감에서 엄마를 찾아뵙기도 했다. 엄마 말씀에 건성으로 대답했던 적도 많았다. 모녀 관계라고 해서 언제나 애틋하기만 한 것은 아니잖은가. 엄마가 내 속마음을 너무 모른다며 원망도 했고 짜증도 많이 부렸다. 엄마를 조금 이해하기 시작한 건 내가 바늘귀 꿰는 게 힘들어지기 시작한 나이 50 무렵부터이니 그 이전에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는지 차마 말하기 어렵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뿐 아니라 9명의 손주들을 맨 먼저 마중 나오신 분이기도 하다. 우리 집안의 모든 아이가 태어날 때 엄마는 그곳에 계셨다. 아기를 낳고 엄마가 끓여주신 첫 미역국밥을 먹던 날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가 지금까지 내게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이 몇 번이었을까? 결혼하기 전까지 만 28년으로만 계산해도 3만번 이상 밥상을 내게 차려주신 거다. 반면에 나는 몇 번이나 엄마께 따뜻한 밥을 지어드렸던가. 지금까지도 당연한 듯 엄마표 밥상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통화할 때 엄마는 언제나 물으신다. “밥은 먹었냐?” 엄마가 떠나시고 나면 내가 오늘 점심을 먹었는지 굶었는지, 자장면을 먹었는지 비빔밥을 먹었는지 궁금해할 사람은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평생 우리에게 따뜻한 밥 대접을 해오신 엄마는 그런데 무슨 신세를 우리 5남매에게 지셨으며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일까? 엄마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해드릴 방법은 없을까? 이건 5남매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이번 생에 나는 그분의 몸을 빌려 태어나 모녀 사이라는 참 특수한 인연을 누렸다. 그렇다면 엄마가 떠나실 때 웃는 얼굴로 보내드리고 싶다. 엄마의 생애가 고운 오렌지빛 노을처럼 아름답게 저물기를 축복해야겠다. 또 지금 여기 내가 제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어쩌면 엄마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일 것이다. 이제 엄마랑 같이 먹는 토요일 점심은 마치 즐거운 의식처럼 소중하다. 그건 엄마가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니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