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미 동화작가
호의를 가지고 대중 앞에서
뭔가를 하는 사람에게는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뭔가를 하는 사람에게는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지난주 금요일에 집 근처 공원에서 공연이 있었다. 일주일 가운데 가장 바쁜 날이라 집에 오면 길게 늘어지곤 했지만 이날만큼은 들떠서 피곤한 줄도 몰랐다. 지하철 계단에 붙은포스터에서 가수 명단을 보자마자 묘하게 설렜다. 이 대단한 양반이 우리 동네 공원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음악적 감수성이나 조예랄 게 없는 내가 이가수를 특별히 여기는 건 개인적 경험 때문이다. 우울증 비슷한 게 왔을 때 공부를 다시 하게 됐는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내 선택이 사치가 아닌가 괴로운 즈음이었다. 그때 우연히 공연장에서 그의 걸진 노래를 들었고, ‘같은 상황이라도 누가 해결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는 위로를 받은 듯했다. 그리고 내 아버지를 떠나보낸 슬픔.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들했고, 일상은 고스란히 남았고, 배고프면 먹기도 해야 하는 사람인지라 그냥 살다가 그의 노래에 발이 턱 걸렸었다. 버선발로 사뿐사뿐 걷는 듯한 그의 <찔레꽃>이 미처 토하지 못한 내속울음을 끄집어냈다. 그렇게 울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무엇이 누군가에게 특별하다는 건 설명이필요 없는 일이다. 그저 소통하는 지점이 있을 뿐이고 나는 그것을 다시 느끼고 싶어 저녁도 거르고 공원으로 갔다. 운 좋게도 거의 앞자리에 앉아 그의 순서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드디어 그가 무대에 나타났다. 어수룩해 뵈는 태도와 말투. 그것이 콘셉트인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건 노래의 힘이니까. 그가 첫노래를 부르는 동안 무대 앞으로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 몇몇이, 어른들이 무대 앞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열정적인 록그룹의 무대가 끝난 직후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였을까. 아쉽게도 무대 앞은 노래 한곡이 끝날 때까지 어수선했다. 어차피 열린 공간이고 텔레비전처럼 가수의 표정이 보일 리없지만 그래도 앞이 어지러운 건 집중에 방해가 됐다. 나는 차라리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
며 노래만 듣기로 했는데 노래를 마친 그가 말했다.
노래 들으려고 저 뒤에서 기다리는 어른들이 있으니 조용히 해 달라고.
저희끼리 큰소리로 이야기하던 앞자리의 여학생 둘이 웃었다. ‘키킥!’ 순간 가슴이 뻐근하도록 슬퍼졌다. 무대의 그가 이 소리를 들었다면 광대가 된 기분이었을 거다. 그는 여전히 표정을 유지하며 한 음도 소홀히 하지 않고 노래해야만 했으니. 그러나 당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이 무대 앞을 뛰어다녔다. 여기에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곤욕일 것만같은,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을 것만 같은, 노래하는 삶이 순간 휘청했을지도 모를 슬픔이느껴졌다.
작가를 초대하는 자리에 종종 나가는 터라이런 종류의 슬픔을 나는 안다. 강연장에서 어른과 아이가 견디는 시간이 달라서 동행한 아이들이 강연장을 돌아다닐 경우가 종종 있다.아무도 그 아이를 말리지 않았을 때 무대에 선사람은 등줄기에 땀이 나도록 신경이 곤두선채 책임을 다할 수밖에 없다. 어서 빨리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아이니까 그러려니 해야 하나. 무대에 서는 사람이니 그 정도쯤에는 너그러워져야 하나. 잘 모르겠다. 그러나 무대에 자주 서는 사람도 늘 긴장하고 대중의 시선을 두려워한다는 건 말할 수 있다. 호의를 가지고 대중 앞에서 뭔가를 하는 사람에게는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내 생각과 달라도 귀 기울여주는 태도는 바로 그 자신의 품위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남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을 것이고, 어린 사람은 그런 기회가 더욱 많을 텐데.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