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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낮은목소리] 대학, 언젠가는 가야겠죠? 평생 이름표니까… / 이경미

등록 2011-06-23 19:31

친구들 우르르 대학 갈 때 취업 결심했지만
낮은 월급, 힘든 근무 환경에 좌절만 커진다
사회는 왜 고졸자에게 기회조차 안 주는지
대학 가기 싫지만 결국 나도 똑같아지는 걸까
‘당당한 고졸자’이고 싶은 전문계 고등학생들

‘촛불’은 보편성을 상징한다. 최근 서울 청계광장에서 타오른 ‘반값 등록금 촛불’은 고액의 대학 등록금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보편성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편성의 함정도 있다. ‘누구나 대학 가는 세상’은 졸업 후 취업하는 게 당연한 전문계 고등학교의 현실을 흔들어놓았다. 지금 전문계고 졸업생 10명 중 7명은 대학에 간다. 취업을 하는 나머지 3명은, 당연한 선택을 하고도 우리 사회의 소수자가 됐다.

‘낮은 목소리’는 대학과 취업 사이에서 방황하는 전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여러 직장을 거치며 진로를 찾고 있는 한 청년의 ‘취업기행’을 통해 고졸 취업자들의 고민을 들어본다. 또 대학이 직업교육을 삼켜버린 현실에서 전문계 고등학교 교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된 직업교육을 정착시키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현직 교사와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본다.

복잡한 대학 등록금 문제의 해결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할지도 모른다.

스무살 김진호(가명)씨는 경기도에 있는 한 놀이공원에서 정비사로 일한다. 관람열차가 공원의 구석구석을 다닐 수 있도록 열심히 기름칠하고 나사를 조인다. 작업이 없을 땐 가끔 관람객들에게 탑승 안내도 한다. 근무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사람이 몰리는 주말에 일하는 대신 평일에 이틀을 쉰다. 진호씨가 받는 월급엔 ‘인센티브’가 적용된다. 본인이 얼마나 일하는지는 상관없이 관람객이 얼마나 많이 열차를 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열차 운영업체와 근로계약을 그렇게 맺었다. 성수기 때는 한달에 180만원까지 받지만 비수기에는 130만원까지 내려간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지난해 고3 때 잠깐 일했던 직장을 떠올리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훨씬 편해서 만족스럽다.

지난 2월 진호씨는 서울에 있는 한 공고의 자동차과를 졸업했다. 지난해 상반기부터 기업체에 지원서를 넣다가 여름방학 때 천안에 있는 삼성전자 하청기업에 입사했다. 휴대전화 액정화면을 만드는 업체였는데, 불량품이 없는지 점검하는 일을 맡았다. 학교에서 배운 자동차 정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연봉 2300만원. 고졸 생산직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자동차과 나와서 카센터에서 일하면 한달에 80만~90만원 벌어요. 근데 그 회사에선 한달에 200만원 가까이 손에 쥘 수 있으니까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진호씨가 입사할 때 같은 학교 3학년생 20명이 한꺼번에 그 업체에 들어갔다. 전공과 관련이 있든 없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팔팔한 청년들도 그 회사의 근무 패턴은 견디기 힘들었다. 12시간 근무에 2교대 체제. 처음 2주 동안은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고, 그다음 2주간은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근무했다. 휴무는 8일에 한번 돌아왔다. 잠을 자야 하는 낮에는 잠이 안 오고, 일하고 있는 밤에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몸이 힘들어지니 회사에 가기도 싫었다. 참고 오래 다닌다고 해서 미래가 밝은 것도 아니었다. 생산직에서 오래 일한 고졸 선배들 중에 ‘과장’을 단 사람이 없었다. 진호씨는 결국 두달 만에 그만뒀다. 그를 포함해서 15명이 1년도 안 돼 그 회사를 관뒀다.


그래도 다섯명은 남아서 꿋꿋이 일하고 있다. 그중엔 같은 과 친구 박성태(가명)씨도 있다. 성태씨는 액정판을 선반에서 다른 선반으로 옮기는 일을 한다. 같이 들어간 동기 중에는 가장 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 끝나면 잠만 자고, 눈뜨면 다시 일하는 생활에 지쳐가고 있다. 성태씨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 군대 갈 때까지만 참고 다닐 생각이다.

반면 학교로 복귀한 진호씨는 취업 담당 부서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지난해 11월에 놀이공원 정비사 일자리 소개를 받았다. 연봉은 조금 낮아졌지만 근로 조건은 훨씬 나아서 다니기로 결정했다.

진호씨의 같은 과 졸업동기는 32명이었다. 그중 21명이 대학에 갔다. 4년제 대학에 들어간 친구는 2명. 나머진 전문대에 입학했다. 대체로 전공을 살려 자동차학과나 기계과 쪽으로 갔다. 서너명은 전공과 전혀 다른 요리나 호텔경영 쪽으로 갔다. 취업한 동기는 진호씨와 성태씨를 포함해 5명뿐이었다. 이 중 한명은 반도체 조립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나머지 둘은 공연기획사에 들어가 음향기기를 설치하는 일을 했는데, 최근에는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는다고 한다. 대입도 취업도 성공하지 못한 나머지 6명은 뭐하고 지내는지 모른다.

대학을 간 친구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비전이 안 보이니까 결국 생산직으로 다시 취업하려고 기웃거리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다른 학교의 선배는 연봉도 괜찮은 회사의 사무직으로 취업했는데도, 고졸 학력 때문에 차별을 겪자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대학에 갔다. 진호씨처럼 전문계 고등학생들은 취업을 해도 고민, 진학을 해도 고민이다. 이들에게는 최선과 차선이 아니라 최악과 차악을 고르는 선택지가 놓여 있을 뿐이다.

취업을 생각하는 진호씨도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대학 진학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해보니 영 적성에 맞지 않아 2학년 때 취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뭐, 대학을 꼭 20살에 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 요즘은 대학이 워낙 많고 취업자 특별전형도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대학 졸업장 따는 건 쉬운 일이다. 대신 지금보다 더 나은 직장을 찾고 있다. 몇가지 가능성이 있긴 하다. 가장 좋은 건 현대·기아차의 생산직에 입사하는 경우. 그러나 최근 몇년간 고졸 생산직 공채가 없어 기대를 크게 하진 않는다. 다음으로는 항공이나 철도 쪽 정비사로 취업하는 일. 자동차업계에 비해 연봉도 높고 근무 조건이 훨씬 좋기 때문이다. 다만 이쪽에 취직을 하려면 대학을 나와야 지원 자격을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 졸업이 평생 이름표처럼 따라다녀요. 웬만한 회사의 지원 자격에는 ‘대졸 이상’이라고 커트라인이 있잖아요. 전 사실은 대학 안 가고 싶거든요. 근데 언젠가는 가야겠죠?” 남들 간다고 따라서 대학 가는 건 싫을 정도로 주관이 뚜렷한 진호씨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있다.

진호씨는 고등학교 3년간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취업정보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 학생들 대부분이 대학을 가려고 하니 학교에서도 진학 위주의 정보를 제공했다. 취업을 하려는 친구들은 학교로 들어오는 채용정보 외에는, 담임선생님이 알음알음으로 일자리를 소개해주거나 각자가 아는 인맥을 동원해 일자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진호씨의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이 전공을 살려 취업할 수 있는 장기적인 모델을 그리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며 “정부와 기업체가 학교와 연계해서 직업교육을 해줘야 하는데, 정부는 예산만 지원하고 그냥 학교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라고 말한다.

매사에 긍정적인 진호씨 역시 “대학 졸업을 당연하게 여기고 고등학교 졸업자에게 지원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 너무하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렇지만 그가 바꿀 수 있는 일은 없다. 늦어도 내년 초에는 대학을 가든 군대를 가든 진로를 결정할 일만 남았다. 스무살 청춘의 머릿속은 뱅글뱅글 돌아가는 롤러코스터처럼 어지럽기만 하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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