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란 소설가
늘 그 자리에 있는 집,
언제든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집,
코때 묻은 물건이 남아 있는 집
언제든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집,
코때 묻은 물건이 남아 있는 집
옛집 꿈을 꾸었다. 초인종 소리에 “아빠다!” 소리지르며 두 동생과 앞다퉈 마당으로 뛰어나가는 꿈이다. 아버지를 먼저 맞이하려는 욕심에 서둘다가 누군가의 슬리퍼가 벗겨졌다. 한데 엉켜 넘어지고 깔깔 웃어대다가 꿈에서 깼다. 6월, 지금쯤이면 마당 한쪽에 심긴 장미가 만개할 때이다.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사물을 분간할 무렵, 우리는 이미 그 집에 있었다. 방과 부엌, 장독대 등의 단어를 그 집에서 배웠다. 막내는 그 집 안방에서 태어났다. 나이 든 조산사가 뛰어오고 안에서 문이 잠겼다. 엄마의 신음 소리에 우리는 조산사가 엄마에게 해코지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엄마 살려달라고 울며 고함을 질렀다. 한참 뒤 문이 열리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의 신기함이란. 그렇게 우리는 작고 꼬물대는 붉은 아기, 막내를 그 집에서 만났다.
그 집을 떠날 때도 6월이었다. 등교하면서 둘러본 마당엔 계단 난간을 휘감고 선홍색 장미가 피어 있었다. 그 집을 떠난 지 삼십년이 다 되어 오는데 아직도 나는 꿈에서 옛집에 산다. 여전히 마루는 삐걱거리고 조심성 없이 다락방 방문 모서리에 머리를 찧는다.
옛집을 다시 찾은 건 이태 전이었다. 버스만 타면 삼십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인데도 가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정표처럼 남아 있는 옛 건물을 만날 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아예 낯선 곳처럼 서성이게 만드는 곳도 있었다. 마침내 옛집으로 내려가는 언덕 위에 섰다. 그 언덕을 자전거로 내달리다가 전봇대에 부딪혔었다. 그때 아픔이 생생한데 그곳엔 언덕도 골목길도 전봇대도 없었다. 몇십 채의 집들이 허물어진 커다란 구덩이엔 시공사를 알리는 펼침막과 굴착기뿐이었다. 구덩이 어디쯤이 옛집 자리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의 추억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옛집은 내게 고향이었다. 내 고향집을 찾아 굴착기가 땅을 파는 걸 한참 내려다보았다.
옛집을 떠난 뒤로 이집 저집 옮겨다녔다. 일층에도 살았고 24층 꼭대기에도 살아보았다. 일층은 한낮에도 불을 켜야 할 만큼 어두웠고 24층은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내가 누운 아래로 23층이나 되는 집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고공 타워크레인 위에 누운 듯 아찔했다. 아파트라 마당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옛집을 떠나면서 쓰지 않게 된 단어들이 점점 늘었다. 장미나무, 다락방, 지하실, 장독대, 분합문 등등.
조금 오래 산 아파트는 꿈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구조가 엇비슷해서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였는지 단번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꿈에서 깨면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데 뭔가로 속상하다. 꿈속에서도 혹시나 아이가 뛸까봐 조마조마했던 건 아닐까. 아이에게 “뛰지 마!”라고 고함을 쳤던 건 아닐까. 까치발로 걸었던 큰애와는 달리 작은애에게는 어떤 엄포도 통하지 않는다. 참아주는 아래층 아주머니가 고맙고 언젠가는 울리게 될 인터폰에 전전긍긍이다.
공동육아를 함께하고 있는 부모들과 요새 계획하고 있는 일 중 하나가 바로 그 일이다. 전세살이에 지친 부모들과 공동마당을 만들어 아이들이 뛰어놀게 해주자는 부모들, 생각은 조금씩 다 다르지만 한 가지 생각은 같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고향집을 찾아주는 것.
공동주택 실행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벌써 내 가슴속 고향집엔 불이 켜졌다. 늘 그 자리에 있는 집, 언제든 그 자리에서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집, 코때 묻은 아이들 물건이 남아 있고 아이들의 꿈에도 나올 집. 한 아빠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아, 그럼 부부싸움도 못 하잖아!” 괜찮다. 누군가 싸워도 고향 옛집 골목에선 모르는 척 눈감아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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