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저 스위스 은행의 비자금이
깊이 없는 우리 사회에 깊이를
마련해 준다고 해야 할 것인가
깊이 없는 우리 사회에 깊이를
마련해 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안양에서 볼 일이 있어 1호선 신창행 전철을 탄다는 것이 인천행 전철을 탔다. 창밖을 내다보니 오류역이다. 서둘러 구로역으로 되돌아와 신창행을 기다리는데 신동탄행이 온다. 안양을 거쳐 가는지 알 수 없다. 학생들에게 물어도 모른단다. 그때 감색 바지와 흰색 노타이 차림에 반듯하게 가르마를 탄 노인이 이 차를 타면 된다고 거듭 말하며 전철로 들어간다. 나도 따라 들어가 그 옆에 앉았다.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조금 늦겠다고 문자를 보내는데,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스위스가 먼가요?” 멀긴 하지만 비행기를 한 번 타면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가 나에게 베푼 친절도 있기에, 직항으로는 왕복 300만원이 조금 넘고, 경유해서 가면 그 반값이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실은 스위스 은행 전화번호만 알면 되는데.” 내가 무슨 뜻이냐고 눈으로 묻자, 70년대에 최고위직에 있던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스위스 은행에 거금을 예치해 두었다고 했는데 그가 곧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기 이름이 은행에 기록되어 있는지, 돈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노인을 다시 살펴보니 운전기사나 이발사로, 요리사나 재단사로 권력자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보살폈던 사람일 성싶기도 하다. 법률회사 같은 데를 찾아가 보라고 했더니 난감한 기색이다. 집안에 젊은 사람이 있으면 스위스 은행들을 검색해보고 이메일을 보내는 것도 방법일 것이라고 했더니, 결국 “선생이 그 일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시냐”고 묻는다. 나는 웃음으로 대답하고 안양역에서 내렸다.
그는 필경 사기꾼일 것이다. 내가 관심을 보이고 조력하겠다고 나서면, 내 욕망을 부채질하고 무슨 핑계를 대서 이런저런 비용을 요구하게 될 터인데, 그 비용은 일이 성사되었을 때 내가 얻을 이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어느 한국인이 스위스에 예치해둔 비자금이 최근 국내에 흘러들어왔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권력자가 제 손발인 사람에게 지나가는 소리로라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을 수도 있고, 그가 반세기 가깝도록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단순하고 무해한 망상가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딘가에 자기를 위한 거금이 있다고 믿고, 그 허황한 믿음을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을 따지자면, 사기도, 근거가 있는 믿음도, 없는 믿음도, 그 뿌리는 모두 망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스위스 은행의 비자금 이야기는 거칠 것 없었던 군사독재권력과 물론 관계가 있다. 권력을 휘둘렀거나 휘두르는 사람들에게 그 비자금은 엄연한 현실이겠지만,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낭만적 전설처럼 들린다. 그것은 해적 선장 키드가 카리브해의 어느 섬이나 해안절벽에 숨겨 놓았다는 보물과 같기도 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집안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그 집에 깊이를 준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저 스위스 은행의 비자금이 깊이 없는 우리 사회에 깊이를 마련해 준다고 해야 할 것인가.
스위스의 비자금에는 키드의 보물이 누리는 낭만적 깊이 같은 것은 없다. 어떤 농부나 양치기에게 발견된다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인 키드의 보물은 어떤 풍경을 때로는 윤택하게 한다. 설령 그것이 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서민으로서는 접근도 할 수 없는 스위스의 비자금은 우리의 소박한 삶을 비웃고 우리의 상처를 들쑤시어 우리를 억압한다. 독재권력에 대한 이상한 향수가 역사의 깊이일 수 없듯이 그것은 깊이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깊이의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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