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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아줌마의 조조프로 / 황선미

등록 2011-07-15 18:55수정 2011-07-17 11:20

황선미  동화작가
황선미 동화작가
갑자기 뒤에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몇분간 이어지는 고단한 코골이
그래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하는 게 많다. 직업의 특성도 좀 있지만 공연예술 관람이며 골목길 걷기도 혼자가 좋은 편이다. 기대하는 영화일수록 혼자 본다고 하자 누가 나더러 중증이라고 해서 좀 웃었다. 무엇의 중증일까. 그렇게 해야 오롯이 내 감각이 작동할 뿐이고 그 섬세한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인데.

이번에는 음악영화였다. 늘 그렇듯 조조프로. 오후에 잡힌 방송국 일정 때문이기도 했으나 나는 이른 시간의 텅 빈 영화관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은 한 그룹의 아줌마들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오십대 초반으로 뵈는 그들은 모두 머리부터 구두까지 세팅이 잘된 모습이었다. 마치 격을 따지는 공연장에 들어갈 우아한 관객들처럼. 분명 가족들 뒤치다꺼리 다 하고 나왔을 텐데 저리 단장할 시간을 어찌 냈을까. 혹시 이런저런 치다꺼리들을 잠시 덮어두기로 했나. 아줌마들의 아침이란 보통 가족들이 다 나가기 전에는 낯 씻을 시간조차 없기 마련이고, 해 봐야 표가 안 나는 게 집안일이라면서도 일일이 살펴야 마음 놓는 사람이 아줌마들인데.

누군가 싸 가지고 온 빵을 꺼내며 목소리도 크게 남편 흉을 보기 시작한다. 들어보니 기실은 빵을 사다 준 남편 자랑이다. 그 뻔한 흉에도 장단을 맞춰가며 웃는 그들. 등 돌리고 앉았지만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났다. 이 시간에 여기 있다는 사실을 행복해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게 느껴진다. 이들은 왜 여길 왔을까. 오늘 영화는 음악으로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은 청년들 이야기고 여기는 독립영화관인데. <워낭소리> 조조프로 볼 때가 생각났다. 내 뒷자리에 일흔 가까이 돼 보이는 할머니들이 죽 앉아서 싸 가지고 온 과일과 떡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영화를 보았다. 간간이 한숨도 쉬고 혀도 차고 욕도 하면서. 사실 나는 연일 관람객 수치를 갈아치운다고 소문난 영화보다 그 아침의 할머니 관객들이 더 흥미로웠고, 이거저거 안 된다는 곳에서 그걸 다 해버리는 강단에 통쾌함도 좀 느꼈다. 마치 소풍 나온 애들 같고 무궁화호 열차의 추억 같기도 한 풍경.

별 기대 안 했는데 꽤 좋은 영화였다. 과장되고 단백질 인형 같기만 한 텔레비전 속 아이돌과는 분명히 다른 ‘사람’, 미숙하고 불안하나 꿈틀거리는 자아를 표현하고자 시행착오를 겪는 청년들, 눈을 감고서 음미하게 되는 음악, 꼭 한 번만 스물다섯살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영화였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코 고는 소리가 났다. 또 빙긋 웃음이 났다. 몇분간 이어지는 고단한 코 고는 소리. 그래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조조프로까지 선택하고도 코를 골 수밖에 없는 데에는 참 많은 게 담겨 있으리라는 걸 우리는 안다.

새삼스레 ‘영화관이 참 좋다’ 느껴지던 날을 난 아마 못 잊을 거다. 그때 나는 서른세살이었다. 결혼 전에는 그냥 그랬다. 마음 내키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 그러나 임신과 출산, 두 아이로부터 몇시간 자유로워져 동네 영화관에 다시 들어가기까지 육년이나 걸렸을 때의 감정은 참말이지 남달랐다. 텅 빈 영화관에서 입체적인 사운드를 느끼며 조조프로를 보던 날 촌스럽게도 가슴이 다 설렜으니 말이다. 비로소 나만의 시간을 붙잡았다는 느낌이랄까.

 특별한 경우 아니라면 결혼한 여자가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갖기가 그리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남편 애들이 다 떠나서 자유로워질 때면 여자는 어느덧 늙어 있고. 그러기 전에 어떤 아침을 놓치지 않은 아줌마들이 지금 여기서 조조프로를 보고 있다. 엄마나 아줌마를 벗어나 오롯이 내가 될 수 있는 짧은 시간. 건강하고 아름다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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