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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낮은목소리] 글자 배우니, 가슴에 품었던 말 이제 꺼낼 수 있네요

등록 2011-07-21 19:27

지난 18일 오전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부천만화창작스튜디오에서 김용문씨가 만화로 자서전 만들기 수업을 듣고 있다. 김씨는 최근 부천문해교육협의회에서 한글을 배웠다.  부천/이정아 기자 <A href="mailto:leej@hani.co.kr">leej@hani.co.kr</A>
지난 18일 오전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부천만화창작스튜디오에서 김용문씨가 만화로 자서전 만들기 수업을 듣고 있다. 김씨는 최근 부천문해교육협의회에서 한글을 배웠다. 부천/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글 배우는 어른들
배움의 기회 놓쳐 여태껏 글 모르고 살아온 인생지하철 타는 것도 두렵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해글은 ‘보통 삶’에 진입하는 문이자 세상 배우는 길속으로 삭여온 억울한 사연들 “신문에 기고할래요”
인터넷이 의사소통과 자기표현의 무대가 된 지 오래, 사람들은 너무 쉽게 글을 쓴다. 사이버 공간에 어지럽게 배설되는 글은 날카로운 창과 화살이 되어 타인을 공격한다. 우리가 가볍게 글을 쓰는 사이, 한 글자 한 글자에 자신의 인생을 담아내는 이들이 있다. 여러 사정으로 글을 배우지 못해 어른이 되어 글자를 배우는 ‘문해(文解)학습자’들이다. ‘낮은 목소리’는 경기 부천의 한 복지관에서 글을 배우며 자신의 삶을 바꿔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20년간 문해학습자를 가르쳐온 전문가에게 우리나라 문해교육의 현황에 대해 들어보고, 늦게 글을 깨친 이가 직접 쓴 기고글도 함께 싣는다.

“봄볕이 따뜻한데 거(건)강하신지요. 누나 내가 벌써 부천에 온지가 이년이 댔(됐)다. 그러나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운전면허도 따고 졸업장도 받고 싶어요. 누나 우리 만나서 이야기해요. 안녕히 계세요. 동생 용문이가.”

경기도 부천에 사는 김용문(42)씨는 지난해 봄 ‘문해(文解)학습자 편지쓰기 대회’에 참가해 큰누님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김씨가 태어나서 처음 쓴 글이자 누군가를 향한 ‘메시지’였다. 어렸을 적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을 못 배운 김씨는 2년 전부터 부천에 있는 한 복지관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노력 끝에 1년 만에 글을 깨치자 가장 먼저 평소 엄마처럼 보살펴주는 큰누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지난 19일 부천 원미구청 맞은편의 부천만화창작스튜디오를 찾았다. 20대부터 70대까지 뒤늦게 글을 배우는 12명이 모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만화자서전을 만들고 있었다. 대체로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머니들이 많았다. 김씨는 이 중에서 유일한 남성이었다.

전북 무주가 고향인 김씨는 일곱살 때 친구들과 놀다가 개울가 다리 아래로 떨어진 뒤부터 걷지 못했다. 친구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그는 집에 누워 있어야 했다. 공부는 꿈꿀 수 없었다. 심심하고 외로운 나날이 계속되면서 어떻게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매순간 몸부림쳤다. 그러자 7년 만에 기어다닐 수 있었고, 스무살이 되던 해 기적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성장호르몬 분비가 멈춰 신체는 아이 시절에 머무르고 있다.

두 발이 자유롭게 되자, 김씨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네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그러나 학교에선 나이가 너무 많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어렵게 두 군데를 찾아갔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쑥스럽고 실망스러웠다. 그 뒤 학교에 다닐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스물두살,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자 김씨는 돈을 벌어야 했다. 일자리를 수소문해 서울 신림동 봉제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뒤 전국을 돌아다니며 금은 세공이나 지갑 만드는 일을 했다. 마지막으로 영등포의 한 사출공장에서 음료수병 뚜껑을 찍어내는 일을 했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김씨에게 세상은 두려움 자체였다. 버스나 지하철을 못 타 택시만 타고 다녔다. 멀리 이동해야 할 때는 형이나 누나가 차로 데려다줬다. 누가 어디로 찾아오라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났다. 간판을 읽을 수 없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수없이 물어가며 찾아야 했다.

“모든 면에서 힘들더라고요.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그거 몰랐어?’ 한마디에 크게 위축됐어요. 공장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괄시를 많이 받았어요. 12년 동안 일했는데 승진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세상 살기가 싫고 살 의미가 없더라고요.”

술과 담배에 기대어 좌절 속에서 지내고 있을 때, 김씨는 사출공장을 그만두고 친한 누나의 조언에 따라 부천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글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접 원미구청을 찾아가 춘의종합사회복지관 성인문해학교를 소개받았다.

늦게 배우는 터라 영 속도가 붙지 않았다. 배워도 자꾸 까먹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1년째 되니 은행에서 이름, 계좌번호, 주민번호를 쓸 수 있게 됐다. 길을 지나가면 간판도 눈에 들어왔다. ‘저기는 삼계탕집이구나.’ 버스와 지하철을 다시 타기 시작했다. 훨씬 자유로워졌다. “예전엔 말실수할까봐 말도 못했는데 이제는 기분이나 생각을 말하는 데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제야 김씨는 가슴에 품었던 절실한 이야기를 고백한다. “일을 하고 싶어요. 여기 와서 여러 군데를 알아봤지만 다 거절당했어요. 이제 글을 아는데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아요. 지금은 부업으로 스위치 조립 일을 하지만 용돈 벌이도 안 돼요. 저는 조금 불편할 뿐이지 두 발 두 손 다 쓸 수 있는데, 사람들은 조금 불편하든 많이 불편하든 상관하지 않고 똑같이 장애가 있다고만 생각하고 무시해요. 근데 사람은 일을 해야 하잖아요. 아무 직장이나 일할 수만 있으면 좋겠어요.”

공부도 더 하고 싶다고 한다. “초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싶어요.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꼭 합격하고 싶어요. 인터넷을 배워서 애인을 찾는다는 글도 쓰고 싶고요. 가정도 꾸리고 사회의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그냥 보통사람처럼요.”

김씨처럼 한국 사회에서 ‘보통사람’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열심히 글을 배우고 있다. 같은 반에 있는 탈북자 이주연(가명·22)씨도 마찬가지다. 2008년 한국으로 건너온 이씨는 북한에 있을 때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 중국에서 3년을 보내면서도 그 나라 국민이 아니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한국에 온 뒤 편의점, 식당, 휴대전화 공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문을 받거나 간단한 대화를 하는 중에도 외래어가 너무 많아 알아듣기 힘들었다. 컵, 스트레스… 이런 용어가 낯설었다. 사람들이 ‘왜 저것도 모르지?’ 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래도 애써 아는 척하지 않고 친구한테 물어봤다. 말을 빨리 배워야 무시당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새터민들 중에서 공부를 포기하는 사람이 80%라고 해요. 북한에서 대학 나온 사람들도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 할 정도로 언어나 문화가 달라 적응하기 어려워요. 그래도 한국에서는 배워야 살 수 있잖아요. 한국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씨는 올해부터 일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4월에 초졸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이제 중졸 시험을 앞두고 있다.

“새터민도 글을 배우고 공부하고 싶은데 사정이 어려워요. 빨리 돈을 벌어 북한에 있는 가족들한테 보내줘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젊은 여자들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아요. 정말 열심히 살려고 하는 새터민들이 많은데, 사회가 무시하는 시선으로 보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언젠가는 이런 생각을 정리해서 신문에 기고도 할래요.”

이들은 글 한 자 한 자를 배우면서 매일 새로운 발견을 경험하고 있다. 글을 배운 뒤에는 달력을 보고 ‘하지가 지났구나’ 하고 계절의 흐름을 알 수 있다. 택배기사가 오면 이름을 쓰고 물건을 받을 수도 있게 됐다. 한희자 춘의종합사회복지관 성인문해학교 교무부장은 “이들에게 글은 보통 삶에 진입하는 문이자 세상을 배우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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