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어진 칼럼니스트
모든 중년들 안에 이 꿈이라는
이름의 활화산이 있다
우리는 점화장치를 필요로 한다
이름의 활화산이 있다
우리는 점화장치를 필요로 한다
오디션이 대세라더니, 과연 어느 채널이든 오디션이 눈에 띈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이번엔 ‘청춘합창단’ 오디션을 재방송해준다. 은근히 재미있다. 나이는 52살 이상, 그러니까 5080 합창단을 모집중이다. 전국에서 3000명이 지원해 서류 심사를 거친 남녀 200명이 오디션에 참가했단다. 평균 나이 62.3살이라니 ‘청춘’을 내건 이름이 애교 있다. 젊은 심사위원들 앞에 선 지원자들은 너나없이 바들바들 떨면서 노래를 부른다. 성악, 가곡, 유행가, 포크, 뮤지컬 등 온갖 장르의 노래가 쏟아진다.
친절하게도 화면은 그들의 직업을 알려주고, 간단한 이력을 덧붙인다.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오디션 대상자들을 선정한 걸까? 주부, 무역업 종사자, 의사, 호텔 경영자, 농구선수뿐 아니라 전직 펀드매니저, 국어교사, 미대 교수뿐 아니라 탁구 강사, 현직 스탠바이 뮤지컬 배우까지 알록달록이다. 음대 졸업 후 살림에 묻혀 살다 43년 만에 노래를 부르러 나온 60대 여성은 ‘기회를 달라’며 읍소를 서슴지 않는다. 아픈 이들이 여럿이다. 한 50대 지원자는 바로 얼마 전 간암 선고를 받고 오디션에 왔다고 한다. 확대 복사한 악보를 들고 나타난 2급 시각장애인 여성이 있는가 하면 15년간 장애인 아내를 돌봐 왔으며 자신은 대장암 3기 생존자라는 분도 있다. 유방암 말기 환자였으나 완치 판정을 받은 68살 여배우 이주실씨의 발랄함은 거의 자체발광 수준이다. 허리 디스크에다 녹내장을 앓고 있다는 양봉가는 만만찮은 이력을 숨기고 있는 인상을 준다. 아픈 게 어디 몸뿐이었겠는가. 1년 전 외아들을 잃었다는 50대 후반 부부는 남편의 기타 반주로 포크송을 잔잔히 부른다. 별 기교 없이 담백한 화음이다. 콧날이 시큰해진다.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외벽에 걸린 정현종 시인의 시구가 절로 떠오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어깨에 메고 오디션에 왔다. 처자식 부양이라는 무겁디무거운 짐을 조금 내려놓은 얼굴들이 보인다. 어미 노릇, 아비 노릇의 고달픈 의무 복역을 웬만큼 끝낸 이들의 홀가분함도 읽힌다. 근데 도대체 노래가 뭐길래, 무엇이 그들을 오디션으로 끌어냈을까? 다만 노래하고 싶어서? 합창단에 뽑힌다고 해서 특별한 보상이나 상금을 받는 건 아닌 듯하다. 서울로 합창 연습을 하러 오려면 지방에서 만만찮은 수고를 감수해야 할 터인데, 오디션 참가자들은 그런 것쯤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들이다. 젊은 감독의 지시와 지적이 까칠하게 들릴 가능성은 이미 농후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열심히 배우겠다’고 이구동성이다.
그 간절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건 뭐랄까, ‘타는 목마름’에서 온 것 같다. 지금까지와 다른 무언가를 자신의 삶 속에 집어넣고, 중년 이후를 새롭게 살아보려는 꿈 말이다. 노래든, 춤이든, 여행이든, 출가 혹은 은둔이든 누구에게나 수줍은 꿈이 있다. 중년과 노년에 이른 이들은 이제 더 이상 꿈을 감춰둘 수 없다. 그들 안에, 아니 모든 중년들 안에 바로 이 꿈이라는 이름의 활화산이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점화장치를 필요로 한다. 그들이 오디션에 온 것이, 노안으로 눈이 가물가물해지는 바로 지금, 내가 이제야 ‘세상의 모든 고전을 읽을 때가 왔구나’라고 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화면 속 오디션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빛난다. 결국 인간의 존엄은 그 어떤 상황에서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로서 갖는 존엄이 아닌가. 꿈꾸기, 그것은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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