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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누구나 아는 이야기

등록 2011-08-19 19:01수정 2011-08-19 19:17

하성란 소설가
하성란 소설가
쪽대본, 이라는 말을 우리 애도 안다
드라마를 쓰지는 않지만,
창피하기도 하고 굴욕스럽기도 하다

“떨어져라!” 어릴 적 귀가 닳게 들은 소리 중 하나이다. 너무도 열중한 나머지 대번에 그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말을 감지했다는 건 이미 두세 번 반복한 뒤가 뻔하다. 그러니 어른들도 입깨나 아팠을 것이다. 불벼락이 떨어질까 마지못해 엉덩이를 조금 뒤로 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청구가 또 이어진다. “떨어져라.” 떨어지면 좋을 텐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은 어른들의 불호령을 듣고야 만다. “아예 들어가라, 들어가!” 정말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

떨어지라는 건 바로 텔레비전에서 떨어지라는 것으로 텔레비전을 가까이에서 보면 눈이 나빠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도 말을 듣지 않자 부모님은 방 가운데 난 선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규칙을 만들었다. 두 장의 장판이 겹쳐지면서 생긴 그 선, 그 선을 부모님 몰래 숱하게 넘나들었다.

그 당시 텔레비전은 집에 단 한 대, 그것도 귀중품처럼 안방에 놓여 있었다. 밤이 깊으면 부모님 잠이 깨지 않도록 전등을 끄고 소리를 줄인 채 명화를 보았다. 낡은 텔레비전 화면이 검게 사그라지며 먹통이 되는 날도 있었다. 물론 요령을 알았다. 텔레비전 몸통을 한 번 쳐주면 정신이 난 듯 화면이 되돌아오곤 했는데 혹시나 그 소리에 아버지가 깨지는 않을까, 그만 끄라고 역정을 내지는 않을까 좌불안석이었다. 그 열성으로 외국 배우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들의 출연작들도 줄줄이 꿰게 되었다.

너무 가깝게 본 탓인지, 어둠 속에서 텔레비전을 본 탓인지, 아니면 눈이 나빠 텔레비전 앞으로 가까이 가게 된 건지, 전후 사정은 모르겠지만 눈은 점점 나빠졌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엔 6디옵터로 떨어졌다. 안경알이 팽팽 돌았다. 안경알 속의 눈이 희극적으로 불거져 보이는 게 싫어 안경을 벗고 다니다가 다른 번호의 버스를 타기도 했다. 그쯤 되면 함민복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를 만도 하다. “텔레비전을 아버지라 부르고 싶다.”

그 버릇 어디 갈까, 지금도 좋아하는 드라마는 ‘본방 사수’하려 방송 시간을 미리미리 챙긴다. 어릴 때처럼 몸이 자꾸 텔레비전 앞으로 가지는 않지만 대신 목을 빼는 모양이다. 몰입하다 못해 어느 날엔 어이없이 당하기만 하는 주인공이 답답해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아, 바보!” 좋아하는 남자배우가 나오면 어느새 입이 헤벌쭉, 남편이 지나가다가 어이없다는 듯 묻는다. “그렇게 좋아?”

그러다 보니 문외한이더라도 드라마 제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쯤은 눈치채게 되었다. 유난히 올여름은 비가 많았다. 유난히 올여름 드라마에도 비가 많이 왔다. 드라마가 끝날 무렵이면 나오는 다음회 예고편이 불쑥 생략되기도 한다. 다음 편이 어떻게 될까, 기다리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다. 방송이 내일이니 설마 아직까지 촬영을 끝내지 못한 건 아닐 테고. 아하, 지금 한창 편집중이겠구나. 시청자는 다 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성의없고 졸속이다 싶은 드라마에 빠져든 자신이 좀 한심해지기도 한다. 좋아하는 드라마가 시청률 저조라는 명분으로 느닷없이 서둘러 끝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쪽대본, 이라는 말을 우리 애도 안다. 드라마를 쓰지는 않지만, 창피하기도 하고 굴욕스럽기도 하다. 제대로 좀 할 수 없나요? 라고 따지고 싶지만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 힘을 합해 드라마 시청 거부 운동을 벌일까요, 라고 하고 싶지만 그 나이에 드라마나 본다는 소리 들을까봐 겁이 난다. 물론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드는 드라마도 있다.

단물 뚝뚝 흐르는 복숭아를 먹으며 눈 덮인 산이 배경인 드라마를 보고 싶다. 피서가 따로 없을 텐데. 물론 재방송은 사양이다.


하성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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