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유신시절의 독재자도 국민을
방종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착한 생각이 가득했을 것이다
방종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착한 생각이 가득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독재는 온갖 것을 감시하고 규제하였다. 머리칼이 귀를 덮는 남자들은 파출소로 끌려갔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은 거리에서 잣대질과 가위질의 수모를 당했다. 음반에는 이른바 건전가요를 한 곡 이상 넣게 했고, 많은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금지된 노래 중의 하나가 송창식씨의 <왜 불러>인데, 나는 아직까지도 그 노래가 왜 거기 끼었는지 알지 못한다.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이런 가사의 어느 대목이 독재자의 비위를 거슬렀을까. 떠돌아다니던 이야기가 있다.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교련을 받던 시절인데, 어느 대학에서 사열을 하던 대학생들이 대오를 지어 검열단 앞을 지나갈 때 ‘우로 봐’ 구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송창식씨의 저 노래를 불렀다. 그것도 가사를 변조하여 “왜 불러 왜 불러 공부하러 가는 사람을 왜 불러”라고 불렀다. 사복경찰들이 덮쳐들어 학생들을 잡아갔고, 노래는 그 이튿날 금지곡이 되었다는 설이다. 물론 그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다.
유신 막바지에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고, 독재자는 제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 나는 박정희가 죽은 다음해인 1980년 3월 마산의 한 대학에 정식교원으로 임명되었다. 학교에는 부마항쟁의 주동자로 잡혀가 감옥생활을 하다 돌아온 학생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몸집이 단단한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인데, 그 학생이 내 수업시간에 한 말을 나는 지금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이런 말이었다. “군사독재가 없었더라면 팝송이 발달해도 얼마나 발달했겠어요.” 최근에 <나는 가수다>를 시청하던 내 눈자위가 조금 붉어진 것도 노래에 감동해서라기보다는 그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십줄에 들어섰을 테고, 당시의 저보다 더 나이 많은 자녀를 두었을 그 여학생과 그의 친구들이 그때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저 가수가 저렇게 노래를 잘 부를 수 있을까, 제 자유와 사랑을 저렇게 당당하게 펼쳐낼 수 있을까.
여성가족부가 노랫말에 ‘술’이나 ‘담배’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많은 노래들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는 말이 들린다. 나는 이 조처가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착한 마음에서 비롯하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저 환상적으로 엄혹했던 유신시절의 독재자도 국민들을 나태와 방종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착한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이 저마다 스스로 성장하고 스스로 다스릴 만한 판단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능력 자체가 위험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을 간섭했고,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정했으며, 부르는 노래를 감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불러야 할 노래를 스스로 만들어 가르쳤다. 그는 우리가 저마다 살아야 할 삶의 목표까지 정해 주었지만, 사람들은 날마다 불안했고 나날이 주눅이 들어갔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 글도 잘 쓰고 멋도 잘 낸다. 그것은 이들이 누가 미리 지정해준 삶을 곱게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제가 저 자신을 자유롭게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긍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김수영 시인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말했던 것처럼 제 마음속의 복숭아씨와 살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그 힘을 창조력의 밑받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판단하고 선택하기 전에 모든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가려 놓은 채, 생명에 삽질을 하고 시멘트를 발라 둑을 쌓아 둔다면, 거기 고이는 것은 창조하는 자의 사랑이 아니라 굴종하는 자의 증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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