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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허리 통증과 함께 한 여행 / 박어진

등록 2011-09-02 19:15

박어진  칼럼니스트
박어진 칼럼니스트
삶이라는 거대한 지구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을 동료로서
어찌 축복하지 않을 것인가?
몇달 전 잘못 배달된 택배 상자를 현관 밖으로 끌어내려다 삐끗한 허리가 말썽이었다. 병명은 척추 인대 염증. 의사는 ‘앉아 있지 말고 누워 지내라’는 처방을 내렸다. 회복은 더뎠다. 급기야 오래전 계획한 여행 날짜가 닥쳐왔다. 남편의 출장에 모처럼 동행하려던 참이다. 값싼 비행기표는 환불이 쉽지 않았다. 나는 강행을 외쳤다. 몸을 눕힐 수 없는 비행기 속 10시간의 악몽과 환승을 거쳐 도착한 곳은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많이 걸을 수도,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아니, 바쁠 게 하나도 없는 날들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나는 아침밥을 천천히, 듬뿍 먹기로 한다. 바삭한 베이컨을 수북이 담고, 온갖 빵을 한 조각씩 접시에 담는다. 아침 홍차의 향기를 처음으로 음미하는 호사까지, 절로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다. 부른 배를 안고 동네 큰 공원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아침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간 후 해가 뜨고 공원은 호젓하다. 비에 젖은 몸을 부르르 떠는 콩새들이 보인다. 작은 정자 처마에서는 빗물이 똑똑 떨어진다. 신발을 벗고 비에 젖은 잔디밭을 맨발로 걸어본다. 차갑고 상쾌하다. 난생처음이다. 키 크고 위엄 있는 나무들 사이로 걷는다.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무릎을 굽히며 그들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한다. 크고 오래된 어느 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비실거리며 몸을 눕힌 채 실눈을 뜨고 나무를 우러러본다. 최소한 백년 이상 그 무거운 가지들과 잎들을 매달고 서 계셨는데 혹시 허리가 아프지나 않은지 묻는다. 오래된 나무들에 대한 존경심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음도 고백한다. “근데요. 사람은 나이 들수록 아름답기가 힘들어요. 향기롭기는 거의 불가능하구요. 그래서 나이 들수록 멋있어지는 나무들한테 질투가 나요.” 한낱 포유류 영장류인 너희들 인간하고는 다르다는 듯, 나무는 과묵하게 나를 내려다본다. 그가 아주 오래된 영혼인 것처럼 느껴진다. 함께 고요한 순간이다.

허리 덕분에 관광을 게을리할 권리를 확보했으니 길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커피와 연어샌드위치를 주문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구경할 차례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라면 “그들과 같은 태양 아래 이마를 그을릴 시간”이다.

온갖 재미있는 옷차림과 표정을 한 이들이, 젊거나 나이 든 걸음걸이로 저마다 독특한 아우라를 내뿜으며 곁을 스쳐간다. 동양인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는 아이들에겐 윙크를 날려 화답한다. 아이들이 웃는다. 기분이 좋다. 아마도 평생 단 한번으로 그칠 그들 모두와의 우연한 마주침이다. 서로 다른 피부빛깔과 말, 서로 다른 종교와 언어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그들도 나처럼 쉽게 상처받고, 실수를 마구 저지르며, 가끔 잘난 척하는 존재들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들 역시 나처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삶이라는 거대한 지구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을, 동료로서 어찌 축복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모든 이들에게 함박웃음을 보낸다. 웃는 것이라면 자신이 있으니까. 내친김에 성당으로 진출한다. 신자는 아니지만 조신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아멘’을 외치고, 순한 눈빛의 이웃들과 악수를 교환한다.

아픈 허리가 내 신분을 관광객에서 여행자로 바꾼 것일까? 숙제하듯 명소를 섭렵하던 성실한 관광 스타일은 포기했다. 많이 보기보다 많이 머물기, 깊게 보기로 노선이 바뀐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보라는 메시지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빨리 달렸을 때 놓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어떤 일들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조금씩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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