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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낮은목소리] ‘고품격 감정노동’을 위해 필요한 것 / 권수정

등록 2011-09-15 19:21수정 2011-09-16 11:32

권수정  공공운수연맹 아시아나항공지부장
권수정 공공운수연맹 아시아나항공지부장
권수정 공공운수연맹 아시아나항공지부장
나는 항공기 승무원이다. 승무원 5년차쯤 되었을 때 제주공항으로 비행을 갔다. 태풍의 영향으로 비행기는 낙엽처럼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렸고 손님들은 겁에 질려 좌석 팔걸이를 꽉 그러쥐고 있었다. 곧이어 ‘번쩍’ 하더니 번개가 비행기를 때렸다. “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 번의 착륙 시도가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김포공항으로 되돌아와 내리는 손님들의 모습은 혼이 나간 듯했다. 그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어느 손님은 비행기 좌석에 소변을 지리기도 했다. 그날의 비행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최악의 악천후 비행이었다. 사실 그날, 나도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내 앞에 있는 많은 손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수없이 교육받은 대로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랬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승무원들은 무엇보다도 손님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서 무척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항공안전, 보안, 의학적 지식과 응급처치, 그리고 기내 서비스까지 수개월 동안 철저하게 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강도 높게 교육받는 것은 감정노동자로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 즉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손님의 요구에 순응하는 법에 관한 것이다. 수요자인 손님의 욕구와 제공자인 승무원의 감정이 부딪치는 상황에서 승무원의 감정은 전혀 존중되지 않는다. 이착륙할 때 규정을 무시하고 핸드폰을 사용한 손님의 잘못보다는 친절하게 말하지 않은 승무원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 손님의 성희롱이나 취객의 행패보다는 ‘센스’있게 처리하지 못한 승무원의 대응이 도마에 오른다. 이렇듯 고객 만족이 기업 생존의 화두가 되면서 승무원들은 기본 업무에 충실하기보다는 더 활짝 웃어야 하고 더 낮게 무릎 꿇어야 하고 더 많이 참아야 하는 감정노동이 극대화되고 있다.

감정노동은 직업적 판단과 전문가적 식견을 바탕으로 하는 고품격 상품이다. 그만큼 과학적이고 체계화된 훈련과정이 필요하고 숙련도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감정처리의 내용·범위 등도 체계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르다. 감정노동을 개인의 품성이나 성격으로 치부하고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상냥함을 잃지 않고 인내심을 발휘하게끔 강조하는 것이 전부이다. 감정노동의 내용과 기준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감정노동은 끝없이 강화되는 반면에 상응하는 보상은 거의 없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감정노동을 지속적으로 요구받게 될 경우에 발생하는 문제점은 심각하다. 실제 느끼는 감정과 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크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휴일에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경우도 있고, 우울증과 홧병 등으로 심한 경우에는 회사를 떠나기도 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감정노동을 인정하는 노력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회사는 상식 밖의 손님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어주고, 단계적이고 다양한 대응 매뉴얼을 통해 감정노동이 최소화되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상담을 통해 스트레스를 줄이고 상처받은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소비자는 돈이면 다 된다는 의식을 버리고 합리적인 선에서 요구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법과 제도는 ‘감정노동’이라는 의미와 가치가 힘을 얻고 사회적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노동이 이미 상품이 되었다면 그로 인한 피해나 스트레스를 관리·처방하는 노력은 전 사회적으로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감정노동자와 감정노동의 수혜자가 더불어 행복한 세상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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